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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밟고 올라서야 내가 산다

총알고둥의 하찮은 생존경쟁

by 깅이와 바당

결국 자기만 살겠다고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다.



'하찮다'는 말이 유행한다. 원 뜻은 대수롭지 않거나 보잘것없다는 것으로 다소 부정적이지만 요즘은 작지만 귀엽다는 좋은 뜻으로도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좁쌀무늬총알고둥-3-2.jpg 제주도 암반 조간대의 좁쌀무늬총알고둥 군락


바닷가에서 정말 하찮아 보이는 생물이 있다. 어쩌면 아예 눈에 띄지 않아 존재감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이 생물은 바다의 가장자리에서도 맨 끝, 그러니까 바다보다는 육지에 가까운 곳에 산다.


바다생물 해설이나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바닷가에 진입하자마자 늘 내가 하는 말이 있다.

"여긴 아무 생물도 안 보이죠? 그럼 서 있는 발을 들어 발 밑을 다시 한번 잘 보세요."

그제야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생물을 밟고 서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발 아래에서 바스락 거리던 생물은 좁쌀무늬총알고둥Echinolittorina radiata이다.


좁쌀무늬총알고둥-4.jpg 패각 표면 오돌토돌한 돌기


좁쌀무늬총알고둥은 아무리 커도 높이나 너비가 1cm에 못 미치고 보통 5mm 전후의 크기로 아주 작다. 생긴 것은 소라의 축소판 같은데 표면에 오돌토돌한 돌기들이 있어 좁쌀무늬라는 이름이 붙었다. 판판한 바위 표면이나 콘크리트 위에도 붙어 있지만 구멍이나 틈이 많은 제주도 암반의 특성에 따라 그 사이에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아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밀물과 썰물에 의해 물이 들고나는 조간대의 가장 윗부분, 그중에서도 가장 끝은 바닷물이 닿지 않는 날도 많고 바싹 말라있는 시간도 길다. 이런 곳은 대조기의 만조 때나 파도에 바닷물이 튀었을 때만 물에 젖는다. 고둥은 분명 해양생물이고 살려면 물이 필요할 텐데 이들은 왜 이런 곳에 살게 되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먹고사는 것일까?


물속 생물들에게 건조한 환경만큼 불리한 조건이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가장자리로 나오는 생물들은 대체로 약자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포식자를 피하다 보니 다른 조건이 열악한 곳으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좁쌀무늬총알고둥은 작아서 밀려났을 수도 있지만 그 덕분에 열악한 환경에서도 적응하여 견딜 수 있다. 몇 걸음 더 바다 가까이 사는 총알고둥이나 갈고둥이 좁쌀무늬총알고둥에 비해 조금 더 큰 것을 보면 적응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작아진 것인지도 모른다.


좁쌀무늬총알고둥-5.jpg 다른 생물은 거의 살지 않는 열악한 조건


이들이 사는 곳엔 정말 먹을 게 별로 없다. 기껏 해봐야 바위에 뭍은 바닷물에 섞인 유기물이나 미량의 조류 정도일 텐데 그냥 눈으로 봐선 그마저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나마 물기가 전혀 없는 바위 표면을 고둥이 기어 다니며 먹이를 먹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좁쌀무늬총알고둥은 웬만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가끔 비나 파도 또는 아주 높은 조수에 의해 바위가 젖을 때만 잠깐씩 움직이며 그동안 참았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해야 한다.


건조한 것만큼이나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기온이다. 제주 주변의 바다 수온은 한여름과 한겨울의 차가 15도 정도이고 아무리 추운 겨울도 13도 이하로는 잘 내려가지 않는데 기온은 35도 넘게 차이가 나고 겨울엔 영하로도 떨어진다. 게다가 여름철 바위 표면은 복사열로 인해 50도 이상 오르기도 하는데 단백질은 40도부터 변성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런 날 바위에 붙어사는 생물들은 생명에 위협을 느끼게 된다.


좁쌀무늬총알고둥-2.jpg 각구 끝 부분만 살짝 붙어 있다


그래서 좁쌀무늬총알고둥이 바위에 붙어 있는 모습을 자세히 보면 각구의 아주 일부분만 바위에 살짝 닿아 있다. 열전달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견디기 힘든 때도 있다. 그럴 땐 다른 고둥들처럼 돌 아래나 바위틈 속 깊이 숨으면 좋으련만 괜히 발을 내밀어 움직이려다 뜨거운 바위에 맨살이 익어버릴지도 모른다.

좁쌀무늬총알고둥-6.jpg
좁쌀무늬총알고둥-8.jpg 다른 고둥 위에 올라가 있는 고둥들


그런데 여름에 좁쌀무늬총알고둥들이 몇 겹으로 겹쳐있거나 줄줄이 매달린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처음엔 번식행위인가 생각했으나 바위의 열기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간단한 실험을 해보았다.

좁쌀무늬총알고둥-7.jpg 달궈진 바위 표면에 물을 뿌려 보았다


해가 쨍쨍한 날 좁쌀무늬총알고둥이 많이 붙은 바위 표면에 바닷물을 스프레이로 뿌리고 타임랩스로 촬영해 보았다. 움직임이 없던 고둥들은 표면이 물에 젖자 갑자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서로의 위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고 물이 마르자 움직임을 멈췄다.

물에 젖은 동안 움직이는 좁쌀무늬총알고둥


짝짓기라면 굳이 어렵게 위로 올라가 여러 층의 탑을 만들 것 같진 않았고 바위에 붙을 때처럼 다른 고둥 위에 살짝만 닿게 붙은 것을 보아도 이것이 뜨거움을 피하기 위한 행동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자기만 살겠다고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다.


좁쌀무늬총알고둥이 열악한 환경 조건에서 극단적인 생존전략을 쓰는 것 같아도 상당히 성공한 종이다. 바위 해안이면 거의 대부분 좁쌀무늬총알고둥을 쉽게 볼 수 있고 다른 고둥에 비해 훨씬 많은 개체가 사는 지역도 많다. 움직이는 모습조차 쉽게 볼 수 없는 이 고둥의 성공 비결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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