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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절대 알 수 없는 너의 고통에 대하여

<리얼 페인>

by 김송희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너의 고통에 대하여

<리얼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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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분주한 뉴욕 공항,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는 바삐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편한 옷차림을 한 채 느긋하게 앉아 있다. 아니, 그의 눈빛은 어딘지 허무해 보이기도 하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또 다른 남자는 택시에서 끊임없이 전화를 건다. "밴지, 나 지금 택시인데 차가 밀려." "또 나야, 자꾸 전화해서 미안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을 반복해 남기는 남자야말로 약속에 늦어 다급하고 불안한 낌새다. 공항에서 만나기로 한 이 둘은 사촌 간으로 함께 폴란드로 가는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벤지(키런 컬킨)와 그를 향해 분주히 달려가는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는 어릴 떄 함께 자란 친형제 같은 사촌이다. 얼마 전 돌아가신 이 둘의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자신의 고향을 방문해 보라며 약간의 유산을 남겨 주셨고, 오랜만에 단둘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벤지와 데이비드가 뉴욕 공항에서 만나 서로를 얼싸안고, 의미 없이 나누는 몇 분간의 대화를 엿들으면 우리는 이 둘의 캐릭터를 즉시 간파하게 된다. 휴대폰은 가져 오지도 않고, 여행 일정표는 읽어보지도 않는 벤지는 누가 봐도 MBTI가 P일 것이다. 반면, 연이어 뉴욕 도로 상황을 중계하며 음성 녹음을 남긴 데이비드의 MBTI는 파워 J가 분명하다. P는 무계획적, 즉흥적, 기분파라면 J는 매우 계획적이며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것을 지향하고, 돌발적인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을 일컫는다. 데이비드는 휴대폰도 챙기지 않았으면서 폴란드에 가서 피울 대마초는 준비했다는 벤지가 어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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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J와 극강 P의 뿌리 찾기 여행

규칙을 지키며 사회에서 정한 관습대로 살아온(아니, 거기서 밀려날까봐 불안 장애까지 얻은) 데이비드와 달리 벤지는 예측 불허의 말과 행동을 일삼고, 관계의 경계선을 마구잡이로 넘나든다. 공항 검색대를 지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새 친구를 사귀는 벤지를 지켜보는 데이비드의 표정은 복잡 미묘하다. 폴란드에 도착한 두 사람은 홀로코스트 투어 일행을 만나고 각자의 다양한 사연으로 이 투어를 신청한 여행자들과 동행을 시작한다. 역사 전공자이자 투어가이드 제임스는 이 패키지 투어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슬픔에 대한 여행입니다.” 투어 참가자 중 엘로게는 르완다 내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고, 그 외의 사람들 역시 조부모, 혹은 부모가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기 위해 폴란드를 찾은 사람들이다. 엄청나게 사교적인 벤지는 다른 여행자들과 금방 친해지고, 7명의 소규모 투어는 바르샤바와 루블린을 거쳐 폴란드와 유대인의 역사 속 깊숙이 접속한다.


‘상식’이라는 미명으로 공공의 영역에서 지켜지는 대부분을 무시하는 벤지는 분명 개성 넘치고 매력적이지만 보는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감정 기복이 심해 기분이 좋을 때에는 더 없이 유쾌하고 재미있는 청년으로 보이지만, 원치 않는 상황을 마주하면 갑자기 감정을 분출하며 주변을 불편하게 만든다. 평범하고 도식적인 인물처럼 보이는 데이비드와 달리 벤지의 시시각각 바뀌는 기분 상태와 예측 불가의 행동은 이 영화에 일종의 긴장감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 이면에 짙은 우울감이 깔려 있다는 것을 차츰 관객도 알게 된다. 벤지는 쉴 새 없이 떠든다. 좀처럼 가만히 있는 법이 없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거침없이 말을 걸고 어깨동무를 한다. 투어 참가자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에도 계속 끼어들이 리액션을 하거나 무례해 보일 수 있는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 수 많은 발화 속에 정작 자신은 없다. '데이비드는 온라인에서 광고를 팔아요. 우리 할머니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어요.' 내 이야기보단 주로 돌아가신 할머니와 사촌의 과거사를 주절대는 그가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벤지가 무례한 발언을 할 때마다 대신 사과하기 바쁜 데이비드의 인내심은 점차 바닥을 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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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들리는 포화 소리일 뿐

패키지 투어는 단체 생활의 연속이다. 약속 시간은 무조건 지켜져야 하고, 함께 이동하다가 말도 없이 사라지는 행동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민폐다. 단체 생활의 규칙 따위는 지킬 생각도 없는 벤지가 제대로 민폐를 끼치는 것은 다 함께 기차 일등칸에 탔을 때다. 나치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들을 기리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된 바르샤바를 둘러보는 여행을 하면서 기차 이동 시에 일등칸을 타는 이 행위가 몹시 불편했던 벤지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너무 이상하다”며 화를 낸다. “어떻게 다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지? 슬픔을 외면한 채 살아갈 수가 있어?” 꼬리칸에 갇혀서 가축 취급을 받으며 이동해야 했던 유대인의 역사를 따라가는 여행에서, 기차 일등석에 앉아 고급 요리를 먹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 벤지의 분노였지만 “어떻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살아갈 수 있느냐”는 그의 말에는 다른 것, 아니 거의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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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무 일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파티를 하고, 쇼핑을 하고 화려한 쇼를 구경할 때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포화 속에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다. 그것은 멀리 있는 낯선 이의 죽음이며 우리가 외면하는 고통스런 세계의 또 다른 이면이다. 참혹한 수난을 겪은 조상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일등석에서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이상하다고 벤지가 아이러니를 토로하자 데이비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응수한다. “어디서 슬픈 일이 생길 때마다 같이 괴로워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리얼 페인>이 담은 복잡한 이 아이러니는 ‘수탈과 죽임을 당했던 조상에 비해 현대를 사는 우리의 고통은 아주 작고 가벼운 것'이라는 단순한 비교로 전개되지 않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끄럽고 잔혹한 범죄로 기록된 홀로코스트의 강제수용소를 찾아간 이들은 말을 잃고 가슴 아파하지만, 그것이 '현재 나의 고통'에는 어떤 영향을 주지 않는다. 더 아픈 사람을 보며 나의 아픔은 가벼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조차가 대상화다. 그러니 우리가 과거의 고통, 동시대 타인의 고통을 감히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묻는 진정한 질문은 역사적 상흔의 극복이나 그것을 통한 현재의 어떤 깨우침 따위가 아니다. <리얼 페인>은 고통의 크기는 당사자가 아닌 누구도 가늠할 수 없고, 안타깝게도 타인은 절대 거기에 가닿을 수도 구원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역사적 상처를 이해하고 싶어 멀리까지 찾아온 이들의 홀로코스트 투어를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홀로코스트를 방문하는 역사 투어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제각기 현재의 슬픔을 지니고 있다. 마샤는 갑작스런 이혼 후 극심한 외로움을 겪고 있고, 엘로게는 괴로운 학살 현장에서 홀로 살아남아 난민으로 삶을 재건했다. 다이앤, 마크 역시 밝히지 못하는 슬픔이 있을 것이다. 멀쩡해 보이는 데이비드 역시 불안 장애로 약을 먹고 있다. 벤지는 또 어떤가. 할머니의 죽음 이후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가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연은 자세히 소개되지 않지만 우리는 누구보다 벤지가 깊은 내면의 고통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현실적 슬픔 들이,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한 조상들의 참혹한 고통 앞에서 별것 아닌 게 된다면 그동안의 괴로움은 다 무슨 의미였을까. 서로의 고통을 저울추에 달아 누구의 고통이 더 무거운지 잴 수 있나. 혹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구의 고통이 덜어지고 또 완화될 수 있을까. <리얼 페인>은 질문을 던질 뿐 어떤 답도 내놓지 않는다.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다녀온 후 터져 나오는 벤지의 울음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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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그 고통은 나만의 것이야

투어의 막바지 벤지의 일탈 행동에 인내심이 사라진 데이비드는 더는 벤지의 기분을 맞춰주기가 싫어진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벤지에게 상처가 될 말을 내뱉고 만다. 벤지가 자기 전부라고 여겼던 돌아가신 할머니가 벤지를 한심하게 여겼다는 발언. “할머니가 그러셨죠. 이민자 1세대는 힘들게 살고, 2세대는 공부해서 엘리트가 되고, 3세대는 부모 집 지하에서 약이나 한다고요.” 분명 벤지를 저격한 것으로 보이는 이 발언을 들은 벤지는 횡설수설하다 저녁 식사 자리를 떠나고 일행에게 사과를 하던 데이비드 역시 폭발해 버린다. 벤지를 사랑하지만, 그가 증오스럽고, 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로운 벤지가 부럽다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질시하고, 무엇보다 그가 사라질까 두렵다고. 사실 벤지는 얼마 전 자살 시도를 했었고, 저 고통스러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대단한 생명력의 조상을 가진 벤지가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벤지에게 묻고 싶다고. 도대체 왜 그렇게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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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 아이젠버그가 감독과 각본을 쓰고, 제40회 선댄스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리얼 페인>은 ‘두 남자의 로드 무비’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여행을 통해 삶을 깊이 사랑하게 되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류의 이야기는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은 각자에게 분명 무언가를 남긴다. 여행을 다녀온 두 사람의 삶은 이전과 달라져 있다. 많은 로드무비들은 여행 후 달라진 삶의 나침반을 보여준다. 삶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여행을 다녀온 두 사람의 생각이라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리얼 페인>에서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데이비드와 벤지는 어떠할까.


데이비드는 익숙하고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딸 아이를 힘껏 껴안는다. 이제야 비로소 안전한 나의 집으로 돌아온 것 같다. 가족을 껴안는 데이비드의 표정을 우리는 자세히 볼 수 없다. 벤지는 어떠한가. 우리 집에 가서 저녁 먹자는 데이비드의 제안을 거절한 벤지는 첫 장면처럼 다시 공항에 혼자 앉아 있다. 벤지의 내면은 바뀌었을까. 그의 고통은 덜어졌을까.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할머니의 고향을 다녀온 벤지의 마음은 치유되었을까. 할머니가 겪은 거대한 고통의 무게를 직면한 그는 일말의 평안을 얻었을까. 무엇보다 벤지는 왜 우울하고 괴로운 것일까. 영화에는 벤지가 어떤 이유로 자살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조차 나오지 않으며,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도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공항에 여전히 혼자 앉아 있을 뿐이다. 아마도 추측하건대, 벤지의 마음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아주 오래전 무고한 죽임을 당했던 이들의 무수한 고통을 잠시 마주해봤을 뿐. 역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섣불리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고교독서평설에 실린 글읿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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