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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의 고통을 껴안아야 하는가

<이처럼 사소한 것들>

by 김송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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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도 여유가 없는데, 마음이 약해 처지가 딱한 사람을 쉬이 보아 넘기지 못하는 남편은 오늘도 길에서 가난한 이웃 아이에게 동전을 털어주고 왔다고 한다. 다섯 명의 딸 아이는 착하고 신실하게 쑥쑥 크고 있으니 앞으로 돈 들어갈 데도 많을 것이다. 큰 딸 캐슬린, 둘째 조앤 모두 같은 세인트마거릿 중학교를 다니고 있고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으니 고등 교육까지 받기를 원할 것이다. 샛째 실라와 넷쨰 그레이스 모두 구구단과 아일랜드의 강 이름을 열심히 외우고, 언니들이 동생의 공부를 봐주기도 한다. '아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귀여운 막내 로레타는 또 어떤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이 어린 아가는 보채는 법 없이 아빠를 얌전히 기다릴 줄 아는 순한 아이다. 아일린은 저녁을 준비하며 두런 두런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이 무엇을 선물로 받고 싶은지 슬쩍 물어보기도 한다. 석탄 상인인 남편 빌은 여유가 없더라도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주고 싶어할 것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웃집 아이가 맨발로 땔감을 구하는 게 안쓰러워 동전을 털어주고 오는 남자인데. 부유한 이라고는 없이 마을 사람 모두가 공평하게 가난하고 근면한 아일랜드의 시골 동네에서 빚 없이 아이 다섯을 양육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일린은 감사하다. 그렇지만 한없이 마음이 약해 거리에 배고픈 고양이와 맨발로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아 소년의 굶주림에도 자기 일처럼 괴로워하는 남편이 걱정이다. 모질지 못한 그 착한 성정이 그의 장점이지만 온 세상의 불행을 떠안은 듯 밤마다 근심하고 모두 쉬쉬하며 외면하는 수녀원의 그 불손한 여자들까지 걱정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은가. 타인의 사정은 그의 몫일 뿐, 남편이 제발 남을 돕느라 우리 가족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기만을 아일린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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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주인공 빌 펄롱은 다섯 딸 아이를 둔 석탄 상인이다. 아직 어둠이 짙은 이른 새벽에 출근해 저녁까지 동네 곳곳에 석탄을 배달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이들의 쾌활한 웃음 소리와 온화한 불빛이 그를 반긴다. 작은 식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다툼 없이 숙제를 하는 작은 숙녀들의 수다를 들으며 펄롱은 석탄 묻은 손을 공들여 닦는다. 솔까지 이용해 손톱까지 깔끔하게 씻어내는 그의 손을 씻는 행위는 집 밖의 어둠을 집 안으로 들여오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행위처럼 보여 경건하기까지 하다. 그가 손을 씻은 욕실 세면대는 석탄 가루로 인해 검은 물로 찰랑댄다. 웃음기 하나 없던 그는 손을 씻고 화로에 석탄을 넣어 집의 온기를 훈훈하게 채운 후에야 비로소 옅은 미소를 짓는다.


"아빠, 아빠에게도 산타가 찾아 왔었나요?" 어린 딸의 철없는 질문에 펄롱은 짧게 답한다. "그럼." 아빠에게는 무슨 선물을 주었느냐는 딸 아이의 질문과 함께 영화는 펄롱의 어린 시절을 현재로 불현듯 들여온다.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지독히 깊었던 시절,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태어난 펄롱은 윌슨 부인의 집에서 고용인으로 일하는 엄마에게서 태어났다. 가족처럼 모자를 품어주었던 윌슨 부인 덕분에 펄롱은 굶주림 모르고 자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는 질문에 아이는 퍼즐을 받고 싶다 고백하지만 정작 그의 손에는 지극히 실용적인 물주머니가 쥐어진다. 실망했지만 처지를 자각하고 있는 아이는 차가운 얼음물에 손을 담그며 슬픔을 삼킨다.


원작소설은 펄롱의 처지를 한 줄로 이렇게 설명한다.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고. 열 여섯살 때 아이를 낳은 펄롱의 엄마는 심지어 펄롱이 열두살 때 급사한다. 갈 데 없는 펄롱을 윌슨 부인이 거두어 키워줬고 일찌감치 독립한 펄롱은 기술학교에 다니다가 석탄 야적장을 거쳐 오직 건실함 하나로 현재의 위치(석탄 중간상인)까지 이르렀다. 아내 아일린을 만나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 독실한 기독교인 펄롱은 과거를 잊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감에도 문득 과거의 기억으로 괴로워 잠을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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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친구들의 침 세례를 맞았던 어린 시절, 모두가 무시하는 모자를 어떤 편견도 없이 대해주었던 윌슨 부인과 네드 아저씨. 사십대가 된 펄롱은 자신의 과거를 가엾게 여기기 보다는 자신이 타인의 친절함과 배려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임을 되새긴다. 먹고 사느라 바쁘지만 펄롱은 어둠속에서 생각한다. 뭐가 중요한 걸까. 유력한 존재인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날, 석탄 창고에 헐벗고 머리카락이 듬성 잘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린 여자애를 본 후 펄롱은 괴롭고 고통스러워 잠을 이룰 수 없게 된다. 미혼모라는 이유로 수녀원에서 심한 학대를 당하고 있는 소녀 세라를 외면한 후 그의 머릿 속엔 온통 그 생각뿐이다. 방치당해 불행한 아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길을 가다 그런 아이를 마주칠 때 정말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자의 불행이 눈에 밟혀 발길을 멈추고 호주머니에 있던 잔돈이라도 털어주는 이가 있다. 펄롱은 후자인 사람이다.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1996년에 아일랜드에서 문을 닫은 막달레나 세탁소를 소재로 한다. 수녀원의 모습을 한 이 세탁소는 미혼모 수용 시설로 이곳에 맡겨진 여자 아이들은 세탁소에서 강제 노동과 학대를 당했으며 그들이 출산한 영아는 강제로 입양 보내졌다. 이 세탁소의 존재는 국가 기관을 비롯해 마을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두 알면서도 묵인한 이 종교 시설에서 우연히 학대받는 세라를 마주친 펄롱은 작가 키건이 만든 가상의 인물이다. 불의한 것, 그로인해 고통받는 약자를 마주했을 때 누구나 펄롱처럼 고뇌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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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롱은 마을의 권력자인 수녀원장의 강압 속에서 세라를 모른 척 한 것을 내내 괴로워하며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펄롱이 만약 이곳을 고발하고 소녀를 탈출시킨다면, 그의 삶은 지금처럼 평온할 수 없을 것이다. 수녀원은 그의 두 딸이 다니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크리스마스 때마다 마을 모두에게 적지 않은 사례금을 나눠 준다. 수녀원 내부에서 은밀하게 행해지는 악행을 눈감는 대신 주어지는 돈이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작은 마찰이 있었다는 것을 들은 한 부인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에는 조심하는 편이 좋아."라고 충고한다.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대다수가 그렇게 살아간다. 앞서 펄롱의 아내 아일린 시점에서 본 '마음 약한 남편'이야말로 평범한 이들이 볼 때 대책 없는 사람이다. 제 가족부터 챙기지 않고 남의 고통에 발 벗고 나서는 사람을, 현대 사회에선 철없고 물색없다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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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모른 척 한 이후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 남자의 마음의 기척을 표현한 키건의 문장은 매우 명료하고 간결하다. 키건은 '펄롱은 괴로워했다'라고 쓰는 대신 골목의 너저분한 풍경과 스산한 겨울의 추위, 그와는 달리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며 들뜬 가정의 따뜻한 거실을 찬찬히 보여준다. 대조적인 안과 밖의 온도와 풍경처럼, 명랑한 펄롱의 딸들과 대비되는 수녀원의 음울한 소녀들의 낯빛은 펄롱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만약 윌슨 부인이 나의 어머니를 거두지 않았다면, 우리 모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타인의 돌봄과 배려 속에서 자란 펄롱의 마음은 속절 없이 흔들린다.


선의를 베푸는 순간 나와 내 가족이 불행해지는 상황에서 펄롱의 고뇌는 지극히 온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펄롱은 밤 중에 채비를 하고 나선다. 영하의 날씨에 석탄 창고에 또 갇혀 있을 세라를 구하기 위해.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원작 소설 중) 여기서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은 서로를 대하는 친절한 말씨와 부드러운 손짓, 집안을 떠도는 온기와 같은 것들이다. 클레어 키건의 또 다른 소설 <맡겨진 소녀>에서 소녀 코오트와 그를 돌봐준 션 아저씨가 대화 없이 함께 집안일을 하면서 다정함을 나누었듯이. 돌봄과 보호는 말보다는 사소한 행동으로 되물림된다.


어린 펄롱이 받았던 친절을, 현재의 펄롱은 다른 이에게 베풀면서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을 구원한다. 펄롱이 구한 것은 미혼모 세라가 아니라 괴로운 현재의 자신의 양심이다. 폭력과 착취가 만연한 수녀원과 대비되는 펄롱의 아름다운 가정으로 아이를 구출하며, 다시금 영화는 답한다. 세상은 악취나고 고통스러움과 동시에, 이렇게 온전히 아름다울 수도 있다고. <이처럼 사소한 구원>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약자를 구하고 마을에서 배척 당하며 온 가족이 괴롭힘을 당하는, 그 이후의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영화와 소설 모두, 펄롱의 마음 속 섬세한 기척을 조용히 뒤따를 뿐이고, 지저분한 맨발의 세라에게 펄롱이 외투를 벗어주고 부축해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길을 걸어 함께 집으로 들어가며 이야기를 끝맺는다. 그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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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의 고통을 내가 껴안아야 하는가. 왜 나는 나로만, 내 가족으로만 행복할 수 없는가. 그것은 언제든 내가 그 약자의 자리로 떨어질 수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고통은 근미래에 내 것이 되기 때문에 짊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쓰라림으로써 내가 안전망에 있었던 것이기에 원래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우리는 마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온 뉴스에서 '전럐 없는'으로 대서특필 되는 권력자의 난데없는 폭압 앞에서, 우리는 이미 불의에 눈돌리면 그것이 결국 나의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았는가.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 '불의에 맞서는 인물'을 그리는 방식은 다른 영화와 다르다. 영화는 펄롱을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한 없이 평범하고 나약한 가장이자 동료이자 마을의 구성원으로 소개한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고 민주주의의 힘으로 2시간 여만에 해제한 전대 미문의 사건으로부터 며칠 후, 폭력 앞에서도 인간임을,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소설을 써왔던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수상을 앞둔 12월 7일(스웨덴 현지시각) 한강 작가가 스웨덴 한림원에서 '빛과 실'이라는 이름으로 전했던 강연의 일부 내용을 옮기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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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작업을 하던 시기에 내가 떠올리곤 했던 두 개의 질문이 있다. 이십대 중반에 일기장을 바꿀 때마다 맨 앞페이지에 적었던 문장들이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자료를 읽을수록 이 질문들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는 듯 했다. 인간성의 가장 어두운 부분들을 지속적으로 접하며, 오래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인간성에 대한 믿음이 마저 깨어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쓰는 일을 더 이상 진척할 수 없겠다고 거의 체념했을 때 한 젊은 야학 교사의 일기를 읽었다. 1980년 오월 당시 광주에서 군인들이 잠시 물러간 뒤 열흘 동안 이루어졌던 시민자치의 절대공동체에 참여했으며 군인들이 되돌아오기로 예고된 새벽까지 도청 옆 YWCA에 남아 있다 살해되었던, 수줍은 성격의 조용한 사람이었다는 박용준은 마지막 밤에 이렇게 썼다. "하느님, 왜 저에게는 양심이 있어 이렇게 저를 찌르고 아프게 하는 것입니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 문장을 읽은 순간, 이 소설이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벼락처럼 알게 되었다. 두개의 질문을 이렇게 거꾸로 뒤집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중략) 한편 <작별하지 않는다>를 출간한 2021년 가을까지, 나는 줄곧 다음의 두 질문이 나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왔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 빛과 실, 한강 작가의 강연 중


*고교독서평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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