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독서평설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케이팝 아이돌이 악귀를 물리치는 히어로 무비라니. 넷플릭스 글로벌 차트에서 <오징어 게임> 시즌3와 함께 1, 2위를 다투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대한 짧은 소개를 듣고는 사실은 반신반의했다. 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케이팝을 열창하는 3인조 여성 아이돌 그룹이 한국의 전통 무당의 운명을 물려 받아 귀마를 물리친다는 거지? 거기다 그들이 물리쳐야 하는 악귀 무리는 '사자 보이즈'라는 이름의 남자 아이돌인데 이 사자가 '어흥' 사자가 아니라 저승사자라고? 아니, 그런데 이 작품 장르가 풍자나 유머가 아니라 히어로물? 케이팝 아이돌이 주인공인지라 중간중간 주인공들이 케이팝과 함께 역동적인 무대를 하는데 그게 뮤지컬 수록곡이라고? 그느데 그 뮤지컬 넘버가 무려 미국 빌보드 핫100에 차트인 하고 스포티파이 1위에 이어 유튜브 뮤직 1위를 차지했다고? 한국보다도 해외에서 더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 애니메이션을 둘러싼 반응들이 속속 업데이트 되고서야 뒤늦게 넷플릭스에서 재생 버튼을 찾아 눌렀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는 미국의 소니 픽처스가 제작사란 사실을 모르고 보면 한국에서 만든 작품이 아닌가 싶을 만큼 첫 장면부터 '한국색'을 강하게 드러낸다.
케이팝 아이돌이 주인공인 애니메이션답게 <케데헌>의 첫 장면은 헌트릭스에 열광하는 엄청난 팬덤과 그들의 대형 무대에서 시작하지만, 이어 셀린(김윤진)의 목소리로 헌트릭스가 평범한 아이돌이 아니며 더 큰 사명(인류를 귀마로부터 지키는)을 이행하는 헌터임을 소개하며 문을 연다. 노래와 춤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현직 아이돌이자 헌터인 헌트릭스가 과거 무당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다소 무속신앙적인 장면에서 시작하는 애니를 보면 신기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메리 강 감독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이 설정이 단순히 흥미 위주의 아이디어가 아님을 납득하게 된다.
감독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한 일문일답에서 “굿이라는 건 음악과 춤으로 요괴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보니, 이 영화의 컨셉과 딱 맞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 문화에 이미 있는 것인데, 아이디어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무당은 거의 다 여성이기 때문에 좀 더 연결이 잘 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굿이 최초의 콘서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라고 밝혔다.
메리 강 감독은 한국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명확하게 가지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 제작에 돌입했다. 이 작품이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도리어 한국 팬들에게 입소문으로 역수입된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되짚어 보면, ‘어디 한국 문화를 얼마나 잘 구현했나보자’라고 팔짱 낀 한국인들마저 감화시킨 디테일들을 여럿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문화와 공간 구현, 작품 팬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국립중앙박물관'의 호랑이 굿즈까지 완판시키게 만든 호랑이와 까치 캐릭터(더피와 서씨) 역시 한국의 민화 작호도에서 그림체까지 빌려온 캐릭터다. 세계적인 아이돌이지만 영락없는 한국 소녀인 루미와 미라, 조이가 배가 고플 때마다 찾는 김밥과 한국식 매운 컵라면, 한국 스낵에 대한 디테일은 또 어떠한가. 우리의 헌트릭스는 그 고된 투어 일정을 소화하고 잠깐의 휴식이 주어지자 매니저가 선사하는 ‘호캉스’마저 마다하고 숙소 소파에 털푸덕 주저앉아 주전부리를 먹으며 집순이가 되기를 자처한다. 이 역시 한국의 진짜 아이돌들의 생활 습관을 조사한 결과인데 실제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돌은 소파와 한 몸이 되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루미와 진우가 한 밤에 몰래 접선하는 공간은 낙산공원 성곽길이고 헌트릭스와 악귀가 전투를 벌이는 지하철은 청담대교 위를 지난다. 헌트릭스 숙소에서 본 서울의 낮과 밤의 전경은 서울 스카이타워에서 바라본 그것과 흡사하며 헌트릭스의 무대가 펼쳐진 장소는 서울 올림픽주경기장과 매우 유사하다. 사자 보이즈가 갑자기 데뷔 무대를 펼치며 거리 공연을 하는 곳은 다름 아닌 명동 거리이며 루미와 진우가 함께 '프리'(Free)를 열창하는 곳은 북촌 한옥마을, 헌트릭스의 골든(Golden)의 뮤직비디오가 재생되는 곳은 삼성역 전광판이다. '서양인이 상상한 아시아의 어드메를 비슷하게 스케치'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도 알아볼 수 있게 정확하게 구현한(그러나 약간은 미화된) 서울은 당장 방문하고 싶게 세련되어 보인다. 아트 디렉터를 비롯한 애니메이션의 배경팀이 서울을 방문해 주요 스팟들을 직접 보고 스케치한 결과다.
그래서 <케데헌>에는 서양인의 눈에서 바라본, 그 때문에 실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스테레오타입의 한국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한국인이 보기에도 '아니, 저런 걸 어떻게 알고 넣었어?' 싶은 사소한 장면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예를 들어 루미와 친구들이 함께 국밥집을 방문한 장면을 살펴보자. 한국인이 마음에 위로가 필요하면 소울푸드인 뜨끈한 국밥집을 찾는다는 설정부터가 믿음직한데, 캐릭터들의 수저 밑에는 얇은 티슈가 한 장씩 깔려 있다. 외식 때마다 손 빠르게 서로의 수저 밑에 얇은 휴지를 깔아 주는 배려를 이 장면에서 담은 것이다. 또한, '한국'하면 떠올리는 대표 음식인 김치가 <케데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메기 강 감독은 김치를 일부러 등장시키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국에 김치 외에도 맛있는 음식'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고 싶은데, 또 김치를 보여주는 것은 식상"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처럼 현재진행형의 한국 문화를 작품 모든 곳에 알차게 심어놓은 것이 이 애니메이션을 더욱 새롭고 신선하게 만든다. 케이팝을 좋아하고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외국의 1020 세대가 보기에 <케데헌>이 그리는 한국은 '도심과 자연이 잘 어우러진 힙하고 멋진' 공간이다. 이 정도로 제대로 한국 문화와 공간을 구현해버리면 이 작품이 한국 문화를 전유했다고 비꼬아 생각할 수 조차 없게 된다.
<케데헌>의 인기 견인의 가장 큰 요인은 무엇보다 음악이다. 빌보드 차트를 비롯해 스포티파이와 글로벌 주요 음악 차트 상위권을 수록곡들이 장악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사자 보이즈의 '소다 팝'을 따라하는 밈, 여러 아이돌들이 헌트릭스의 '골든'을 커버하는 영상이 업로드 되고 있다. 주요 수록곡에 테디가 대표로 있는 더블랙레이블의 프로듀서들이 참여했고, 트와이스의 멤버들이 신곡인 <TAKEDOWN>을 부르고 <Stategy> 등의 삽입곡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한국의 아이돌 문화를 조금만 안다고 해도 헌트릭스와 사자 보이즈의 활동 과정이 실제 아이돌과는 큰 격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아이돌이 완벽히 시스템화된 회사의 지휘 아래 프로듀싱되고 데뷔 및 컴백 일정이 A부터 Z까지 짜여있는 반면 헌트릭스는 멤버들이 주도적으로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컴백 일정까지 정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한국 팬들이 가장 의아할 수 있는 장면은 사자 보이즈와 헌트릭스가 합동 사인회를 하는 장면이다.
실제론 소속사와 성별이 다른 아이돌 그룹이 합동 사인회를 하는 경우는 전무후무하다.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알 수가 없으며, 아이돌 팬덤은 남녀 아이돌이 연애의 기운을 풍기며 한 공간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니 말이다. 거기다 헌트릭스는 설정상 이미 전 세계를 사로잡은 글로벌 아이돌, 사자 보이즈는 이제 갓 데뷔한 아이돌로 서로 활동 연차가 엄청 나다. 이들은 선후배 관계인 셈인데 '후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영미문화권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기가 어려워 극 중 '후배'라는 말은 영어 더빙에서도 따로 번역되지 않고 한국말 '후배'라는 단어 그대로 사용된다.
이처럼 아이돌 문화를 애니메이션 설정에 맞게 일부분을 가져왔음에도 '케이팝 아이돌'로서 헌트릭스가 영화 바깥에서도 팬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것은 기존 아이돌 산업에서 악수회, 포카, 영상통화와 버블 참여 등을 위해 앨범을 사고 큰 액수를 지불하면서 ‘내 돌’를 응원하고 함께 성장한다는 감각을 갖고 있었던 소비자, 아이돌 팬덤이 ‘진짜 우리를 지켜주는 아이돌’을 작품 속에서라도 만났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극 중 아이돌 활동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영혼이 없는 악귀인 사자 보이즈는 팬사인회가 끝나고 팬들이 준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이는 과거 특정 아이돌이 팬들의 선물이나 편지를 버린 것이 알려져 논란이 되었던 사건을 상기시켜 볼 때 현실 반영적인 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반면 헌트릭스는 '우리 팬을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며 목숨을 걸고 팬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아이돌은 무대 안팎에서 언제나 “팬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인사를 입에 달고 산다. 그것은 일정 부분 진심일 것이다. 팬들이 없으면 그룹은 유지될 수 없다. 팬이 있어야만 앨범을 판매하고, 대형 콘서트 객석을 채울 수 있으며 아이돌은 제작부터 유지까지 어마 무시한 비용이 투입되는 산업이다. 그만큼 그룹이 더 이상 수익이 나지 않는다면 기업은 냉정하게 장기 휴지기를 두거나 갑작스레 해산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룹의 존속 여부는 온전히 팬덤의 여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건 마음을 두고 벌이는 전쟁이야!”라는 루미의 대사와 같이 아이돌 산업은 팬들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피 튀기는 전쟁터다. 오늘은 나를 좋아했던 팬이 다음 날 새로 데뷔한 아이돌에게 가지 않는 법이란 없다. 팬을 지키기 위해 아이돌들이 공백 기간에조차 영상통화, 사인회, 버블 등으로 끝없이 소통을 하며 감정노동을 잠시도 쉴 수 없는 것이 현재 아이돌 산업의 현실이다.
팬들은 용돈과 월급 전액을 쏟아부으면서도 간혹 마음을 보답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그것은 회사가 일을 서툴게 해서이기도 하고, 내 돌이 바빠져서 일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응원하는 아이돌이 뒤에서 팬들을 지키기 위해 악귀와 싸우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헌트릭스의 노래가 상대를 폄훼하고 짓밟기보다는 우리 모두 원래 빛나는 존재이며, 당신 마음의 진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이 디즈니 인기작의 트루기와 한국 아이돌 인기곡의 핵심을 예습 복습했단 사실을 알 수 있다.
<케데헌>의 제작사는 소니 픽처스이지만, 헌트릭스의 골든(Golden) 가사에서 성공한 디즈니의 문법을 엿볼 수 있다. 골든을 처음 듣고 아이브의 아이 엠(I AM)과 <겨울왕국>의 렛잇고(Let it go)가 떠올랐는데, 여성 화자가 “그동안 나를 얽매여 왔던 것들을 왔던 두려움을 떨치고 진짜 자신을 당당하게 찾겠다”는 다짐이 '골든'이라는 곡에도 담겨있다. 루미 헌터로 활동함에도 악령의 문양을 지니고 있다는 비밀을 숨기고 있듯이 <겨울왕국>의 엘사 역시 자신의 능력이 동생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실체 없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두려움을 발로 걷어차고 “넌 그냥 믿으면 돼, 보이는 그대로야. 어제와 또 다른 짜릿한 나. 어느 깊은 밤, 길을 잃어도 차라리 날아올라,”(I AM, 아이브) 진짜 너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라고, 네가 가는 길이 곧 밝게 빛나는 새로운 무대라고 당당하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아이브의 I AM과 같은 곡이다.
<케데헌>의 뮤직 슈퍼바이저 이안 에이센드래스는 참고한 케이팝 아이돌을 묻는 질문에 “매기 강 감독은 케이팝 팬이자 전문가였습니다. 우리는 많은 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몇몇은 몬스타엑스, 블랙핑크, BTS, 에스파, G(Idle), 스트레이 키즈 였습니다”라고 답했다.
“더 이상 숨지 않아, 난 원래 빛나도록 태어났으니까, 우리는 올라가고 있어. 지금이 바로 우리의 순간, 함께일 때 우리는 빛나고 있어. 우리는 반드시 황금처럼 빛날 거야.”(골든 가사)
루미가 꾸밈없는 목소리로 당당한 고음으로 내지르는 이 멋진 가사를 듣고 전 세계의 소녀들이 어찌 헌트릭스의 팬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많은 억압 속에서 진짜 나를 찾고 싶지만, 거울을 보면 내가 못난 것처럼 느껴지고 인스타그램의 다른 애들과 자꾸 비교가 되어 자존감을 가질 수 없었던 나. 아무도 내 손을 잡아 준 적 없지만,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 루미가 다가와 노래 한다. 나도 완벽하지 않아, 나도 두려웠어, 나도 사실은 비밀을 숨기고 있었어. 하지만 이제 알게 됐지. “난 원래 빛나도록 태어났어. 그게 바로 우리가 태어난 이유야.”(골든). <케데헌>은 한국 문화의 매력적인 디테일 속에서 케이팝의 역동적 무대를 구현하고, 뻔하고 익숙하지만 매번 감동받을 수 밖에 없는 ‘진짜 나를 찾는 용기’에 대해 말한다. 이 애니메이션이 지금 전 글로벌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