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시장에 셀러로 참여했습니다

2만원 벌고 5만원 쓰고 옴

by 김송희

지난번 글에서도 밝혔다시피 나는 맥시멀리스트다. 이전의 글에서 ‘맥시멀리스트가 죄인이냐! 물건 많은 게 어때서! 내 돈으로 내가 산 예쁜 잡동사니들을 사랑한다!’고 부르짖었지만, 넓지도 않은 집에 살면서 물건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부담이다. 평생 이 집에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좁은 방에 누워 있으면 방을 에워싼 책, 옷, 공간박스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러다 압사하는 거 아닌가 싶을 때도 있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KakaoTalk_20190624_102110317.jpg


그 잡동사니 중에는 벼룩시장에서 저렴하게 업어온 중고물품도 있다. 내 방에 갖다 놓으면 ‘이런 걸 왜 돈 주고 샀나 싶은 쓰레기’도 영국의 포토벨로 벼룩시장 같은 데서 발견하면 “유레카! 난 이걸 사기 위해 이 나라에 온 거야!”라며 지갑이 쉽게도 열린다. ‘되팔 수 있는 명품’이 아니고야 모든 물건들은 내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 값어치가 급하강한다. 게다가 혼자 사는 사람은 ‘이런 거 사가면 엄마가, 남편이, 룸메이트가 욕하겠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집에는 정체불명의 물건들이 먼지와 함께 쌓여만 간다. 자, 그렇게 쌓인 물건들은 어떻게 처분하면 좋을까. 그래, 바자회! 미국 드라마를 봐도 앞마당 장터가 자기 집에서 열리잖아? 몇년전부터 지자체나 커뮤니티에서 열리는 바자회에 참여해볼까 기웃거리던 나는 이번에 드디어 벼룩시장에 구매자가 아니라 판매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유명인이 여는 바자회도 있지만 일반인들도 자기 공간에서 친구를 초대해서 물건을 처분하고 함께 술 마시며 노는 식으로 얼마든지 마켓을 열 수 있다.(물론 여기에는 어느 정도 평수가 보장된 공간이 담보해야 한다. 좁은 원룸에서 어깨 붙이고 앉아서 물건을 구경할 순 없으니 말이다) 내가 참여한 벼룩시장도 개인이 이사 가기 전에 자기 아파트에서 여는 바자회였는데, 마켓을 열기로 한 2주 전부터 개인 SNS로 홍보를 하고 ‘이런 물건도 팔 거’라고 사진을 올리고 ‘구경할 사람은 여기로 오시’라고 대략의 주소와 연락처를 오픈했다.

KakaoTalk_20190626_200052824.jpg
KakaoTalk_20190626_200053032.jpg


사실 자기 집을 바자회 공간으로 열어젖힌 이 사람과 나는 ‘친구’라고 하기에는 애매하고 ‘동료’라고 하기에도 모호한 관계인데, 이 ‘친구’(이제 친구가 되었다고 하자)가 나에게 일을 주는 클라이언트였고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PM(Project Manager)이었다. 여러 건을 함께 하면서 인스타그램 친구를 맺었는데 그녀가 개인 계정에 올린 ‘벼룩시장’ 사진에 내가 ‘앗, 저도 팔거 많은데’고 댓글을 달았고, 이틀 후 ‘정말 참여하실래요?’라고 메시지가 왔다. 그러니 결국 인스타그램 댓글을 통해 바자회에 셀러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씀. 막상 가보니 일면식도 없는 관계지만 SNS를 보고 셀러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고민은 바자회 참여 전날 시작됐다. ‘오, 저도 물건 가지고 갈게요’라고 답글을 보낼 때에는 호기로웠지만, 막상 내 살림살이를 꺼내놓으니 이게 과연 남에게 권할 만한 물건인지 불신이 들었다. 집안 곳곳에서 돈을 받기는커녕 주고 넘겨야 할 것 같은 쓰레기들만 발굴됐다. 내 집에 ‘물건’은 많지만 이게 ‘남도 탐내할 만한 물건’일까. 취향만 맞는다면 브랜드 상관 없이 사재기를 했던 보세 옷과 그릇들이 대다수라서 이건 내가 아니면 아무도 돈 주고 사가지 않을 것 같았다. 가격표도 떼지 않은 원피스, 작아서 팔뚝 한번 못 끼워본 점프수트, 쇼핑몰 모델이 입을 때에는 예뻐 보였는데 내가 입으니 잠옷 같아서 못 입은 바지, 귀찮아서 반품하지 못한 옷옷옷, 선물 받았는데 개봉도 안 한 디퓨저, 박스 채로 모셔둔 블루레이 세트, 사놓고 김치 한번을 못 올려본 그릇 세트, 너무 많아서 이제 둘 데도 없는 유리잔, 먼지만 쌓이고 있는 책 그리고 또 책...구매 당시에는 ‘이게 없으면 못 살 것 같았던’ 물건들이 이제는 나에게는 짐이고, 남에게도 쓸모없어 보였다.


행사 당일, 빈손으로 갈 순 없어서 그나마 내 물건 중 괜찮아 보이는 물건들을 골라서 동생의 차에 실었다. 원래 나에게 필요 없는 걸 처분하는 게 벼룩시장의 취지인데 쓰레기를 들고 갈 순 없어서 고르고 고르다 보니 나도 아끼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동생은 내 물건들을 보며 비웃었다. ‘아니, 책을 누가 사가, 언니 분명히 저거 그대로 다 들고 온다. 올 땐 데리러 오라고 하지마’.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서 경비실에 호수를 말하고 출입을 허락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남의 아파트에 들어서며 나는 난생처음 ‘보통의 서울 아파트’를 구경했다. 이사를 준비하며 휑해진 공간에 판매물품을 내려놓고 포스트잇으로 가격표를 붙이는 내내 동생은 옆에서 중얼거렸다. “헐, 언니 물건만 이상해. 근데 언니 집이랑 확실히 다르네.” 사람 사는 집다운 아파트 곳곳에 정돈된 다른 셀러들의 물건들은 내 것에 비해 너무 빛나서 나는 박사장네 집에 몰래 들어간 기우(<기생충>)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 가격을 낮춰야겠어. 원래 만원 이하로는 안 팔려 했던 원피스에는 2천원, 3천원의 가격표를 매겼고 책은 전부 무료나눔 책장에 옮겨놨다. 그러다 보니 5만원 주고 산 그릇도 3천원이 되었고, 10만원 주고 산 원피스도 5천원이 되고 말았지만 다행히 그 그릇과 원피스는 안 팔려서 다시 집에 모셔왔다.

KakaoTalk_20190624_103246149.jpg


초라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사실 잠깐이었고, 벼룩시장에 내놓은 남의 물건들을 구경하고 내 원피스가 2천원 3천원에 팔리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매우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구경 온 아파트 주민 중 50대 아주머니가 나의 유리컵 세트를 사면서 남편에게 ‘이거 괜찮네’라고 말할 때에는 나의 선구안이 칭찬받은 것 같아서 으쓱하기도 했다.(물론 4천원치고 괜찮다는 거겠지만) 집에서 물도 잘 안 마시면서 40인 뷔페 파티를 해도 될 정도로 유리컵을 모았던 나의 유리컵 세트는 이렇게 다른 동네 아파트의 4인 가족에게로 가서 좀 더 쓰임을 받게 되겠지. 안녕, 맥주 한번 담아주지 못했던 나의 MADE BY ITALY 유리컵 세트야.

KakaoTalk_20190624_103245934.jpg

5명의 셀러는 색깔이 다른 포스트잇으로 자기 물건을 구분해놨는데, 물건만 봐도 누구 것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개인의 취향이 드러났다. 사실 바자회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나의 물건을 객관적으로 본 적이 없었고 남의 물건 역시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물건에는 개인의 소비형태와 가족구성원이 드러났다. 아기띠를 내놓은 사람은 기혼일 것이고, 고양이 간식을 내놓은 사람은 당연히 고양이를 키우는 집사다. 하지만 ‘물건’이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이었다. 스팽글이 많이 달린 금빛 카디건과 화려한 레오파드 구두가 그의 결혼 여부까지 보여주진 않는다. 뱃지와 마그넷을 많이 파는 사람은 ‘그냥 그것을 좋아하고 모으는’ 사람일 뿐. 거기서 그의 형편까지 알 순 없다. 손님보다는 판매자 가족으로 북적였던 바자회는 6시가 지나 술자리로 변모했다. 거나하게 취해 고기를 구워 먹고 팔려고 내놓았던 태국 라면을 끓여 먹고 셀러끼리 물건을 사고 팔다가 남은 건 선물로 주면서 바자회는 즐거이 끝났다.

KakaoTalk_20190624_103245315.jpg
KakaoTalk_20190624_103112649.jpg


그렇게 많은 물건을 지고 가서 겨우 2만원을 벌었고 주말 하루를 투자했다(2만원 벌고 5만원 쓰고 왔다). 그래서, 바자회 또 참여할 거야? 라고 묻는다면 돈 벌러 나가는 게 아니라 그냥 놀러 간다면 해볼 만한 경험이라고 답하겠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주말 하루도 좋겠지만 이렇게 남의 살림살이를 구경하며 ‘이거 태국가서 샀던 건데~’ 물건에 관련된 추억담을 듣고 말하는 그 시간. 아마 토요일 하루 집에 있었다면 그냥 누워서 뒹굴거렸을 것이고 나에게는 특별한 추억이랄 게 남지 않았을 것이다. 물건은 조금도 줄지 않았고 돈도 못 벌었지만 이제는 경험이나 추억을 위해 시간을 써야 하는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가 가꾼 정원이 세계의 전부가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