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20세기

by 김송희
영화 <벌새>


“너희는 뭘 좋아하니?” 한문학원에 새로 온 영지(김새벽) 선생님이 중2 소녀들에게 묻자 즉각적으로 답변이 나온다. “캘빈 클라인이요.” 지루한 수업시간 킬킬대며 필담을 나누는 소녀들의 연습장에는 미치코 런던이라는 브랜드가 선명하게 새겨있고,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할 때에는 어디선가 ‘칵테일 사랑’이 흘러나온다. 이른 아침 등교한 은희(박지후)가 성수대교가 무너진 참상을 텔레비전 뉴스로 마주하기도 하는 이 영화 <벌새>의 시대적 배경은 1994년이다. 꽈배기와 튀김과자를 파는 학교 앞 빵집에 잘생긴 알바 오빠가 있다는 소문에 여학생들이 줄을 서고, 빵집에서는 '유열의 음악앨범'이 라디오로 흘러나온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연인은 서로 연락할 방도 없이 엇갈리고 한국이 IMF로부터 금융지원을 받는다는 뉴스가 지나친다. 김고은, 정해인의 멜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이 영화 역시 1994년으로부터 시작된다. <벌새>의 김보라 감독과 <유열의 음악앨범>의 정지우 감독은 세대가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90년대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영화를 완성했고 두 영화에서 90년대는 음악과 패션, 인테리어와 소품 등으로 적소에서 정체를 드러낸다.


새로운 복고라는 '뉴트로'가 패션, 인테리어 등에 영향을 미친 것은 꽤 되었지만 지금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과거는 80년대가 아닌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까지로 올라왔다. 90년대가 무슨 오래된 과거야, 라고 코웃음을 치고 다시 세어보니 94년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이다. 오래된 과거 맞다.


‘탑골가요’라는 자조섞인 이름으로 유튜브에서 인기리에 재생되는 SBS <인기가요> 채널은 또 어떠한가. 그 시대에 10대였던 현재의 30대는 이정현과 엄정화, 젝키의 데뷔무대를 소개하는 활기찬 MC 김민희와 김소연, VJ 문근영과 김효진을 다시 보며 향수를 곱씹는다. 그 시절 아직 세포분열도 시작 안됐을 지금의 10대는 무슨 재미로 97년 <인기가요>를 보는 것일까.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세기말적 감성과 무대의상과 퍼포먼스, 은갈치 같은 사이버 전사의 복장을 하고 머리에 안테나를 꽂고 보라색 립스틱을 한 아이돌의 무대를 보는 것은 그들에게 색다른 재미일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이 유튜브가 스트리밍 방송이며 채팅창으로 ‘다 같이’ 보는 채널이라는 점이다. 신승훈의 무대가 시작되면 “신부장님 등판이요!”라고 누군가 채팅을 하고, 그보다 더 윗세대인 변진섭의 무대에는 “변전무님 나오십니다”라고 대화창이 올라온다. 젝키의 <COM'BACK> 무대에는 "쉑따뿌레 지금부터 식초뿌려" "애들 인라인 타다 왔나" "탑골 방탄조끼소년단이네"의 대화가 계속 업데이트 되는 식이다. 그러니까 지금 유튜브 세대에게는 90년대와 2천년대 초반의 가요를 물고 뜯고 즐기는 것이 놀이문화인 셈이다. 게다가 90년대에 일곱살이었던 사람과 열일곱살이었던 사람은 10년의 나이차이가 있음에도 동시대의 문화를 기억하고, 내가 그 시대의 사람이었다고 여긴다. 지금 90년대의 컨텐츠를 즐기는 것이 비단 현재의 30대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처럼 뉴트로의 물결을 가장 발빠르게 잡아채고 유튜브에서 적극 활용하는 것이 SBS인데, SBS는 유튜브에서 ‘K-POP 클래식’채널 뿐아니라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등의 시트콤을 1,2분짜리 영상으로 만들어 조회수 100만은 가볍게 넘기고 있다.


현재가 아무리 즐겁다 해도 우리는 '꽃피던 나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1999년에 중학생이었고 지금 30대인 핑클 팬이 <캠핑클럽>의 ‘영원한 사랑’ 무대를 보고 눈물을 쏟는다면, 2004년에 초등학생이었던 지금의 20대는 <달빛천사>의 ‘New Future’를 들으며 폭풍 오열한다. 2004년 투니버스에서 방영됐던 <달빛천사>는 현재 20대가 된 당시의 십대 여자애들에게는 응원하고 또 위로 받았던 힐링 컨텐츠로서 기억된다. 악성 종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녀가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결국 ‘풀문’이라는 이름의 가수로 데뷔해 무대 위에서 ‘내 노래’를 부른다는, 마치 아이돌 성장 다큐멘터리 같은 내용의 이 애니메이션은 지상파도 아닌 투니버스에서 방영했음에도 당시 초, 중학생 소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달천이’라 불렸던 그 때의 소녀들은 자라서 이제 소비력이 있는 20대 여성이 되었고 '달빛천사 O.S.T 발매를 위한 펀딩'에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당초 음원 저작권을 구매하기 위해 3,300만원의 펀딩 목표금액으로 시작된 펀딩은 개시 4일 만에 10억원을 훌쩍 넘겼고, 현재 17억을 초과했다(아직 펀딩 종료일이 19일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10월 4일 기준). 96년에 태어나 2004년에 초등학생이었던, 현재 스물 네살인 20대 역시 자신의 과거를 그리워하고 그때를 위해 돈을 쓴다. 자신의 수명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오디션장으로 달려가던 루나의 꿈을 응원이라도 하듯, 소녀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자신의 유년시절을 함께 했던 애니메이션에 17억이 넘는 돈을 모아준 것이다. 아니, 2004년이 뭐 그렇게 옛날이라고, 그렇게 추억 아련아련이야? 그래서 계산해보니 이 펀딩의 이름 앞에는 ‘달빛천사 15주년 기념’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2004년이 벌써 15년 전이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지금 중학생이다.


추억에는 쉽게 지갑이 열린다는 점을 이용해 ‘뉴트로’ 델몬트 병은 주스도 없이 빈병만 출시되어 1만9천원에 팔리고, 서울우유 유리병도 그걸 구매하기 위해선 서울우유 사이트에 가입해서 두유세트를 사야한다. 오비라거도 복고풍 디자인으로 한정판 출시되어 두달만 도수가 낮은 곰돌이 맥주를 판매한다고 한다. 유행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기업은 마케팅으로 활용하고 대중들은 그리워하는 과거 추억놀이. 80년대가 음울한 시대성을 배경으로 국가의 폭력과 민주화의 굵직한 사건을 조명한다면 90년대는 사건 사고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며 개인의 일상이 곧 시대임을 드러낸다. 다같이 교련복이나 나팔바지를 입고 빡빡머리나 더벅머리를 한 일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지던 80년대와 달리 한사람의 구체적인 기억과 유행가로 확실한 자아를 드러내는 90년대와 2천년대란 얼마나 개인적인가. 함께 공감해서 재미있으면서도, 그 안에 나만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우리의 20세기. 분명 2040년에는 2019년의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뉴트로란 이름으로 탑골00로 재생될 것이다. 그때의 새로운 세대가 기록하고 소비할 지금의 ‘땡땡땡’이란 무엇일까. 보고 싶다. 살아서.


나일론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고독한 ㅅㅈ방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