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취향
2017년에 둘째아이를 낳고 새로이 입문한 취미생활이 웹소설 읽기였다. 시선이 닿는 곳에 핸드폰을 고정시켜두고 천천히 눈으로 읽으며 손가락은 이따금씩 페이지만 넘기면 되니까. 품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등센서가 발동되어 우는 갓난아기를 두어 시간씩 안아 재우면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취미활동이었다. 이야기에 몰두하면서 잡생각을 날릴 수 있어 산후우울증 예방에도 썩 괜찮았다.
처음에는 현대판 로맨스를 읽었다. 흔히 말하는 '킬링타임'용이었다. 그런데 몇 권 읽을수록 재미가 없었다. 영 내 취향은 아니었다.
장르를 바꿨다. 로맨스 판타지. 어쨌든 로맨스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즈음 나는 '생각'이란 것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고, 진지하거나 심각한 이야기에 전혀 빠져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재밌고 가벼운 '킬링타임'용 소설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로맨스 판타지 소설, 일명 '로판'소설들이 의외로 내 취향에 잘 맞았다. 불면 날아갈 듯 가벼운 제목의 가벼운 문장들 속에서도 결코 날아가지 않은 채 잔잔히 남아있는 여운들이 분명히 있었고, 세계관과 서사들 또한 때로 예상보다 훨씬 탄탄해서 나는 경이로워하며 빠져들었다.
물론, 반복되는 클리셰와 비슷한 설정들, 익숙한 캐릭터의 인물들, 새로울 것 없는 서사, 아무리 '킬링타임'용이라지만 가끔 심하게 어디 갔나 싶은 개연성들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비단 그것은 로판 장르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어느 장르에서든 유행이 있고, 작품들의 작품성 편차 또한 크다. 그럼에도 진흙 속에서 빛나는 진주처럼 반짝이는 작품들은 많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간혹 로판을 다시 읽곤 한다. 가끔 신작 제목만 보고 흥미 위주로 읽어보기도 하고, 예전에 구매해서 읽었던 대작들을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최근에는 일하느라 바빠 꽤 못읽으면서 (지금은 휴직 중이지만) 로판을 잊은지 최소 1년은 넘었을 거였다. 그러다 얼마 전 코로나19 백신 2차 접종 후 미열, 전신무력감, 두통으로 꼬박 이틀을 침대에 누워만 있다가, 문득 다시 생각이 나서 또 오랜만에 로판을 찾아 읽었다.
제목만 보고 고른 최근 신작의 무료 공개편 몇 화만 읽어내렸는데, 역시나 진부할 정도로 익숙한 세계관이긴 했다. 현대의 평범한 주인공이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읽던 판타지 소설 속의 인물이 되어있더라, 로 시작하는 이야기.
로판에서 이제는 지겨울 정도로 흔한 이런 설정 말고 좀 다른, 정말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세계관을 창조해내는 작가님이 등장한다면 진짜 대박을 칠 텐데, 하는 생각. (어쩌면 이미 있는데 내가 안 읽어서 모르는 걸 수도 있다. 나는 생각보다 많은 작품을 읽지는 못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토록 많은 작가님들이 여전히 이토록 흔한 설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식상하게 여기면서도 여전한 그 설정의 로판들을 아직도 읽고 있는 독자들 또한 여전히 많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
또한 그 이유는 바로 내가 현대판 로맨스는 재미없어하면서도, 판타지 로맨스에는 꾸준한 흥미를 잃지 않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인 게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탁, 하고 전등이 켜지듯 떠오른 오랜 기억 하나.
나는 중학교 1학년에 진학하여 같은 반 아이들이 돌려보던 만화책을 자연스레 접하며 처음으로 순정만화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 시절의 소녀였던 거의 모든 여성들은 알고 있으리라. 이미라 작가의 '은비가 내리는 나라' 라든지 '인어공주를 위하여', 이은혜 작가의 '블루', 박희정 작가의 '호텔 아프리카', 원수연 작가의 '풀하우스' 등등.
그런데 그중에서도 내가 단연 좋아했던 만화는 의외로 크게 유명하지는 않은, 하시현 작가의 '낭길리마' 였다.
14살 소녀인 주인공 보늬는 매번 어린 동생의 편만 들고 자신은 혼을 내기만 하는 엄마에게 서운하고 화가 난다. 다 미워! 내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그 시기의 사춘기 소녀가 흔히 욱해서 할 법한 생각을 하며 학원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을 뿐인데... 이런, 어느새 은하철도 999로 변신한 지하철은 소녀를 낯선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은 동화 속에서나 있을 법한 판타지의 세계, 낭길리마였다!
나는 이 이야기가 너무 좋았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내가 원래 판타지를 좋아했구나, 싶다.) 그 시절의 나 역시 우울한 사춘기를 보내던 열네 살 즈음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밤마다 누워서 잠들기 전 혼자 공상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어딘가에 낭길리마가 정말로 있었으면! 나도 낭길리마로 갈 수 있었으면! 그러면 나는 그곳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텐데!
물론 내가 아무리 간절히 기도를 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바로 로판, 로맨스 판타지 소설들 속에서는 말이다.
내가 읽었던 (많지 않은) 인기 많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그 흔한 세계관은 단 몇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대부분 다음 중 하나에 속했다.
1. 판타지 세계관 : 주인공이 해당 판타지 세계관 안에서 태어나 살아가는, 그 세계관 속 삶의 이야기. (이를테면 반지의 제왕이라거나 해리포터처럼, 그저 판타지 세계관 그 자체.)
2. 차원이동 : 현대를 살아가던 아주 평범한 주인공이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전혀 다른 (판타지 세계관의) 낯선 세계에 떨어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3. 빙의 : 현대를 살아가던 아주 평범한 주인공이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읽던 판타지 소설 속 인물, 또는 다른 누군가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빙의한 인물로 대신 살아가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4. 회귀 : 판타지 세계관의 주인공이 자신 또는 타인의 죽음 혹은 인생의 어떤 절망적인 순간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면서, 이번에는 기필코 다른 생을 살리라, 다짐하며 시작되는 이야기.
이렇게 나름의 정리를 해보니 더욱 확신이 간다. 로판, 로맨스 판타지는 나처럼 현실도피를 꿈꾸며 망상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주 최적화된 장르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의 나는 늘 그랬다. '낭길리마'라는,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동화 같은 판타지의 세계가 진짜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세계로의 차원이동을 꿈꾸었다.
소설 속 다른 인물로의 빙의를 왕왕 꿈꾸기도 했다. 가볍게 떠오르는 예를 하나 들면, 중학교 3학년 때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를 읽으면서, '내가 스칼렛이라면! 레트에게 그러지 않을 텐데!' 라며 얼마나 안타까워했던가. (물론 스칼렛 오하라는 충분히 강인하고 아름다웠지만, 그 소설이 열린 결말로 완벽한 작품성을 가진 터라 마음 어린 소녀의 입장에서는 더 안타깝기만 했다.)
어쩌면 내가 가진 현실이 도무지 더는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그랬을까. 아예 다른 세계로의 차원이동을 꿈꾼 것은.
어쩌면 있는 그대로인 스스로의 모습을 도저히 사랑할 자신은 없어서 그랬을까. 아예 다른 사람이 되는, 완전히 다른 삶을 꿈꾼 것은.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진심이었을 수도 있고, 단순한 감정이입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로판이 이러한 '일탈'의 욕망을 너무나 잘 채워준다는 것이다.
특히 로판 소설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빙의라든지 회귀 세계관의 큰 장점은 주인공이 이미 한 번 서술된 이야기의 결말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빙의 장르는 이미 읽었던 책 속의 인물로 다시 태어난 것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비롯한 모든 돌아가는 상황과 스스로가 처한 운명까지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어마어마한 치트키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헤쳐나가고 개척해나가는 것이 수월하다. (물론 서사는 그렇게 수월하게 흘러가지만은 않지만.) 결코 그렇게 비극적인 삶을 두 번 살 수는 없어! 라면서 강력한 의지를 가진다. 회귀 장르 역시 마찬가지. 한 번 살아본 생을 되돌아왔으니 어쩌면 빙의 장르보다 더 한 치트키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들은 자신에게 두 번째로 주어진 삶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로 견뎌내고 살아내어 결국엔 승리자가 된다. 복수를 하고, 사랑을 쟁취하고, 부와 명예까지 누린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세계관이란 말인가.
물론 이제 더 이상 낭길리마로의 도피를 꿈꾸지 않는 어른이 된 나는 이따금씩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럼 원래의 생은? 가족은? 친구는? 자기 자신은? 이렇게 쉽게 다른 세계로 가서, 이렇게 쉽게 생판 남의 삶을 그대로 이어받아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존재론적 의문 한 가닥 마저 모두 떨치기는 어렵다.
간혹 어떤 소설에서는 현대의 주인공이 삶을 견디기가 힘들어 자살을 꿈꾸며 여행을 떠났다가 불의의 사고를 겪으며 다른 세계로 차원이동을 하게 된다, 든가 하는 나름의 그럴듯한 사정들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것도 이제는 너무 뻔한 클리셰가 되어 버렸고, 요즘 대부분의 로판에서는 그와 같은 사정 설명은 생략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째서 빙의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회귀하게 되었는지, 왜 차원이동을 하게 된 것인지는 좀처럼 알 수가 없다.
가끔 그것을 소설 속에서 촘촘하고 탄탄한 세계관으로 유려하게 그려냈다면 그건, 대작의 탄생이다.
뭐 꼭 이런 엄청난 대작들이 아니더라도, 로판은 로판만이 가진 매력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캐릭터의 인물들이 운명의 열쇠를 쥐고서 고난과 역경을 강인하게 헤쳐나간다는 이야기는 판타지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게 용인될 수 있다.
어차피 현실이야 내가 살아내야만 하는 거고, 이런 판타지로 느끼는 대리만족감도 말 그대로 판타지니까 괜찮지 않을까.
이 글을 쓰면서 소녀 시절에 좋아했던 '낭길리마'를 다시 떠올려보고 있자니, 그 시절에 좋아했던 그 마음이 생생하게도 떠올랐다. (얼마나 좋아했던지 놀랍게도 줄거리가 거의 다 기억난다.)
주인공 보늬는 낭길리마에서 만난 멋진 왕자님을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낭길리마는 어린 자신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였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왕자님은 당연하게도 공주님을 사랑했다.
어렸던 내가 낭길리마로 떠날 수만 있다면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보늬는 밉기만 했던 엄마도 보고 싶어졌고 동생도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결국 잃어버렸던 유년시절의 추억과 첫사랑을 되찾아 현실로 돌아온다.
어린 시절 자신이 상상해냈던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잃어버렸던 보늬가, 자신이 만들어냈던 그 세계인 낭길리마로 끌려들어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아 온다는 이야기. 어른이 되었어도, 역시 좋다.
내일모레 나이 마흔을 앞두고 '로맨스 판타지를 읽는다' 고 하면 분명 비웃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로맨스 판타지 소설 읽기는 현실이 힘들어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어!' 라고 외치고는, 자신이 상상했던 판타지 세계로 끌려들어가는 보늬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물론 보늬는 소녀였고, 로판은 살짝 성인 버전.)
가끔은 이런 일탈도 꽤 재밌지 않은가.
우린 어차피 다시 현실로 돌아올테고, 돌아올 땐 보늬처럼 잊고 있던 무언가를 다시 가지고 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