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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imi Sep 10. 2021

사랑의 기록


결혼할 때 내 학교 졸업앨범들을 비롯한 사진앨범들을 친정에서 가져오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건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다지 예쁜 미모의 아이는 아니었으니까) 사실 더 큰 이유는 나 스스로가 그걸 다시 열어보거나 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되어 시댁에 갔을 때 시어머님께서 신랑의 어렸을 적 사진들을 보여주시며 이건 언제 적이었고, 저건 언제 적이었고 웃으며 해주시는 말씀들에도 사실은 큰 관심이 없었다. 그 사진들을 이제 니가 가져가라 하셨지만 나는 굳이 가져오지도 않았더랬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별다른 흥미가 없었을 뿐이었다.

지금은, 지금 아이를 낳고, 아이의 사진을 찍고, 아이의 기록을 남기고, 그 사진들과 기록들을 다시 읽어보고... 그러고 있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

'아, 이건 나의 추억들이구나.

나 자신을 위한 기록들이구나.'

처음에는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어른이 될 내 아이에게 물려줄, 아이를 위한 기록들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아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나 자신을 위한 기록들이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거나, 자신의 지난 시절을 추억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른이 된 아이는 지금의 내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현재 시간들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질 테니까.

지나간 시간들을 그리워하며 추억하고 있을 사람은 아이가 아니라 바로 내가 되겠지.


먼 훗날 할머니가 된 내가 지난 앨범을 들추어 보며, 빙긋이 미소 지으며 이땐 그랬어, 저땐 그랬어, 하여도 다 자란 아이는 그저 무심할지도 모른다. 모두 잠든 밤에 홀로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인생이 쓸쓸하기가 짝이 없다.

그래도 이 순간들을 아껴야지. 아이가 자기 자신 그 자체로 내게 안겨준 반짝이는 선물 같은 순간들을.

내 아이들이 다시 아이 부모가 되어 정신없이 살아가며 자신의 아이 사진을 찍고 있을 때쯤, 그 어느 날 나는 인자한 할머니가 되어 햇볕 좋은 날 창가에 앉아 내 아이가 생애 처음 아이스크림을 먹던 순간, 같은 사진들을 꺼내보며 미소 지어야지.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지. 언젠가 그리워질 날들을 더 많이 남겨두기 위해...






위의 글은 꽤 오래전에 써두었던 글이다. 육아휴직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압박감을 느끼며 며칠 째 아이들의 사진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복직하기 전, 올해가 다 가기 전에 밀린 두 아이의 사진들을 꼭 앨범으로 완성해두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사진부터 정리하는 중에 저 글을 써두었던 게 생각이 났다. 언젠가 아이들의 앨범을 만들 때 맨 앞장에 기록해두려고 써뒀던 글이다.


저 글을 다시 읽는 중에 마음이 또 조금쯤 쓸쓸해진다. 뜨겁던 한여름이 언제였나 싶게 성큼 다가온 9월의 선선해진 아침 공기처럼 내 인생 역시 그러하리라는 생각에 더욱 그렇다. 무한한 듯한 체력을 자랑하며 엄마 아빠를 열심히 쫒아다니게 만들던 내 첫아기는 벌써 여덟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내년이면 어느새 나이 마흔에 접어든다. 아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 아빠보다 친구들과 노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될 테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의 품을 둥지 떠나는 새처럼 떠나고 싶어 할 것이다.


아직 한참 남은 일에 미리 쓸쓸해하는 것이 어리석다 싶으면서도 벌써 하나씩 노란빛을 띄어가려는 나뭇잎을 보면서 계절의 흐름을 바라보는 심상처럼 흐르는 그 마음 또한 막을 수는 없다.


다만 너무 빨리 자라지는 말아달라고 붙잡고 싶은 이 시간을 내 손안에 움켜쥘 수 없는 대신,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대한 애틋함만 마음에 담뿍 담아본다.


언젠가는 내 인생에도 겨울이 올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더 해나가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때가 아니라 지나간 시간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를 준비해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그 계절이 오면, 오늘의 아직 젊은 내가 만들어 놓은 앨범들을 들여다보며 그때 어쩌면 한여름의 더위에 지쳐있을지 모를, 다 자란 내 아이들에게 말해주어야겠다.


이건 너희가 내게 사랑으로 와서 사랑을 주고 또 사랑을 받았던 사랑의 기록들이라고. 너희가 얼마나 큰 사랑으로 이루어진 아이들인지 잊지 말아 달라고. 살아가는 일이 늘 평탄하지만은 않겠지만 부디 그 사랑의 기억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너희에게도 작은 위안이나마 되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오늘도 열심히 사랑의 기억을 남기고 또 기록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그러면서 나 또한 다시 위로받고 힘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2014년 4월에 태어난 첫째와 2017년 9월에 태어난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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