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꼰대를 위한 변명
나는 밀당을 잘 못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데 미숙하다. 가까이 가면 순간접착제처럼 붙어서 내가 너인지, 니가 나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가 많고, 멀어지면 한국말을 잘 모르는 외국인처럼 군다. 익스큐즈 미? 사람한테만 그러면 좋으련만 일과의 밀당에 실패하면 데미지가 크다.
어떤 경우에는 일에 찰싹 달라붙어서 밤이고 낮이고 잠잘 때도 그 생각 뿐일 때가 있다. 눈 앞이 어두워져서 함께 일하는 사람도 안보이고, 온 세상에 오직 나만 있는 것 같다. 내가 이 일의 알파요 오메가다. 내가 일이고, 일이 나라서 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고가는 이런저런 검토와 제안이 나의 인격에 대한 침략처럼 느껴진다. 일에 밀착해 있을 때는 내가 만들어낸 성과나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일상적인 피드백도 마치 나라는 존재에 대한 부당한 개입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흔히 일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나는 자아를 실현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기서 자아를 양육하고 그곳에 자아를 등록한다. 그런데 이게 내가 일을 하면서 만난 사수와 그 사수들의 사수들이 물려준 태도다.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전 삐삐를 차고 다니면서, 냉장고처럼 뚱뚱한 컴퓨터를 앞에 두고 일하던 시기였다. 사무실에서 담배를 피던 시절에 일하던 사람들은 일에 자신의 자아를 의탁하는 게 당연했다.
지금 40대~50대, 혹은 그보다 선배들은 상대적으로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지금보다 높았다고 여기는 분석이 많은데, 틀린 분석이다. 그들은 회사, 조직에 대한 로열티가 높은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자신의 자아를 등록한 사람들이었다. 생각하면 성격도, 취향도, 관계도 회사라는 플랫폼 안에서 형성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언젠가 어느 회사의 대표이사 인터뷰 현장에 있었는데, 제일 좋아하는 가수는 자신이 한창 실무진으로 일할 때 만들었던 제품 광고 모델이고, 제일 좋아하는 노래 역시 그 제품 CF에 삽입된 곡이라는 진술을 들은 적이 있다. 요즘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에피소드가 마음에 와닿았다. 회사에서 만들어진 취향, 회사에서 성장한 자아, 회사를 통해 만나게 된 사람들. 그들에게 마음의 고향은 어머니가 계신 곳도, 가족이 있는 곳도 아니고 바로 직장이다.
회사에 오면 마음이 푸근하고,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정겹고, 친척같고 이웃같다. 이런 분들을 만나면 회사 이야기를 묻는 것이 가장 빨리 그의 자아에 접근하는 방법이 된다. 가끔 그런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고향에 온 것 같은 푸근함을 느낄 때가 있다. 세상이 변해서 이런 감각과 상식은 낡은 것, 때로는 잘못된 것, 권위적이거나 시대착오적인 것이라는 취급을 받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되려고 기를 쓰려고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회식도 일의 일부라고 여기고, 일에 탐욕적으로 집착해서 워라밸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는 자아를 갖기 위해서 매일매일 스스로를 단련한 사람들은 없다. 시대가 만들어낸 상식과 기준에 맞춰 살았을 뿐인데, 어느덧 시대가 사람보다 빨리 업데이트되었을 뿐. 한 사람이 한 생애를 통해 갱신할 수 있는 업데이트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꽃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