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없는데 읽고 싶은 책은 많고, 한 술 더 떠서 굳이 절판된 책에 대한 탐욕 때문에 청춘의 상당 부분을 헐어서 헌책방 순례에 갖다 바쳤다. 오래된 책에 배어 있는 눅진한 냄새가 왜 그렇게 좋았을까. 헌 책을 구하러 다니며 지나던 골목들, 같이 까불던 친구들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보통 각 대학가 앞에 자리잡고 있던 헌책방에서 원하던 책을 구하면, 그 학교 벤치나 캠퍼스 운동장을 찾아 방금 찾아낸 책 상태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허겁지겁 서두를 읽어 치웠다. 덕분에 서울 시내 여러 캠퍼스들도 덩달아 구경하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을 판다는 요즘의 마케팅 인사이트가 그러고 보면 영 허황된 말은 아니긴 하네요. 그렇다. 발품을 판 기억들 때문에, 발견의 즐거움 때문에 그렇게 구한 책들은 새롭게 단장한 개정판이 나와도 여전히 소장하고 있다.
지숙아 잘 지내니? 별 일 없지요? 엉엉 나 잘 있어 언니, 오빠도 무탈하지? 어 다행이다. 우리도 별 일 없어. 네가 구해준 책 읽다가 생각나서 연락해 봤어.
지숙이는 당시에 도서관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는데, 헌책방에서도 구하지 못한 절판 도서들을 학교 도서관 폐기 창고에서 가끔씩 찾아내 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지만, 몇 번이나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지숙이가 구해다 주곤 했다.
그런데 무슨 책인데? 전쟁과 사회.
김동춘 선생이 쓴 <전쟁과 사회>라는 책은 전쟁 이후 만들어진 우리나라 사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 언젠가 100대 인문학 서적에 꼽힌 적도 있었는데, 옛날 일이라 정확한 출처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한국 사회의 생리가 여전히 전시 체제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피난 열차처럼 가득가득 들어찬 출퇴근 지하철, 적과 아군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갈등 양상, 사회적 안전망이 없기에 생존을 위한 다툼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한 체제.
대표적인 전쟁 생존자인 나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볼까. 그는 아직도 영화관에서 총격전이 나오는 장면을 보지 못한다. 웅장한 사운드가 전쟁 당시의 기총 소사와 폭발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란다. 전쟁, 학살, 가난, IMF를 버텨낸 이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서바이버다. 제일 큰 이력은 생존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헤쳐 나온 생사의 위기와 굶주림,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용서할 수가 없다. 갑자기? 나에게는 갑자기가 아니지만 갑자기.
산으로 산으로 악착같이 기어오르고 있는 경리단, 해방촌, 후암동, 이태원의 골목들은 실제로 6.25 때 피난민들, 식민지 해방 이후 해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이들이 정착한 곳이고, 군사 주둔지 주변에 만들어진 상권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해 만들어진 터전. 이 땅의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계, 내가 투항한 사회는 여전히 생존에 압도된 생태계다. 생존 이외에 행복이니 즐거움은 부차적이고 사치스러운, 여전히 낯선 것이다.
살려는 드릴게, 살아 있으면 됐다고 말하는 이들이 닥치는 대로 쌓아 올린 생태계에서 행복, 즐거움의 틈새를 발견한 젊은이들이 이 생태계에 균열을 만든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이번 일도 본질적으로는 그 아이들이 생존에만 매몰된 세대들의 케케묵은 잘못들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이 아이들도 반복적으로 이런 일을 겪으면서 생존에서 고통스럽게 살아남은, 서바이버가 되어 가고 있다.
세상은 아이들에게 굳이 서바이버의 이력까지, 생존을 위한 고통까지 고스란히 물려주고야 말겠다는 징글징글한 원한에 가득차 있는 곳이 아닐까. 강남역 10번 출구, 세월호, 이태원에 이르기까지, 면목없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이 생존의 고통, 서바이버의 원한에 매몰되지 않기를. 그 무엇에도 지지 않기를 기도한다.
메신저 창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는 숫자 1. 연락이 닿지 않는 동료의 인스타그램을 타고 들어가 그녀의 가까운 지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00님은 별 일 없지요? 연락이 되지 않아 초면에 메시지를 남깁니다.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동료가 전화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