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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모스 Jan 01. 2020

새해를 맞이하기 싫은 나에 대한 진단

32일이라고...33일이라고....

참으로 싱거운 한 해였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제자리였다. 나이 먹는 것에 감흥이 없어진다는 말이, 나이 먹는 것을 실감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2학년 다음은 3학년이고 그다음은 졸업인 당연한 업그레이드는 이제 잘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그냥저냥 살다 보면 어이쿠 또 제자리야! 싶어 자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굴레.


연예인들이 어색하게 서서 카운트 다운하는 것도 보고 보신각 종소리도 들었는데 잠이 안 왔다. 잠에 들지 못했으니 12월 31일과 1월 1일의 경계가 쓱싹 사라졌다. 날밤을 새면서 몇 시간 전까진 끝이라는 감상에 취해있던 사람들이 몇 시간 후엔 또 활기찬 시작을 맞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외계인이 지금 지구에 도착한다면 꽤 놀라겠다. 여기 사람들 무슨 약에 취해있는 거야?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연말이라는 것, 연초라는 것, 설날이라는 것, 추석이라는 것, 그런 것에 방점을 찍을 줄 아는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이다. 자신과 사회의 연결고리를 잘 알고, 그래서 주기적으로 주변에 보답하고 스스로는 격려해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이런 관습도 잘 챙기는 거라는 생각을, 외계인이 된 듯 바깥에서 지켜보면서 했다.


내게는 참으로 슴슴한 한 해였지만, 그래서 마지막 하루를 닫는 게 힘들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나는 사실 올 한 해(난 안 잤으니까 오늘은 2019년 12월 32일이다), 삶의 지표가 될만한 진실 몇 가지를 발견했다. 우선, 좋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연초부터 이게 뭔 세상 부정적인 소리야!


하지만 정말 그렇다. 아, 좋은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구나. 어쩌면 앞으로도 그렇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행복이 올 것이라 믿고 버티는 데 쓰지 않을까 감히 상상했다. 내게 2019년이 그랬다. 아, 좀 행복해 볼까? 하다가도 행복의 눈치를 보면서 '아냐 아냐 됐어, 그냥 해 본 말이야'하고 눈치를 보며 자리로 돌아가는 잘 못 노는 애 같았다. 실제로 잘 못 놀긴 하는데, 암튼.


하지만 그래서  어느 때보다 살아있다고 느꼈다면 거짓말일까.() 정신승리 같긴 하지만,  진실이 내게 살아갈 힘을 줬다. 꾸준히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은 덕분에 내게 무상으로 주어졌던 수많은 운과, 우연의 결과물을 다시 보게 됐다. 너희 정말 대단한 일들이었구나? 일단 감탄부터하고, 작별했다. 무소유로 돌아갔다는  아니다.  이상 백마  행운 같은  기다리지 않게 됐는 말이다. 그래 기다리더라도, 혹시나 앞으로   번도 행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대비해 뭔가 하자고 다짐했다.


나의 경우에는,   있는 일이 바로 글을 쓰고 읽는 일이었다. 글을 쓰다 보면 평생을 바쳐해야  일은 다른  아니라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지금 중구난방으로 흩어지는  글을 보면 알겠지만)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글을 쓰려고 앉아 적절한 말을 찾기 위해 고민하다 보면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기만 하면, 정확히 보기만 하면 불행도 불안도 자산 같아서 안심이 됐다. 읽고 쓰는 동안  안에 뭔가 천천히 쌓이는 느낌이었다. 항아리에 물을 조금씩 쪼르르, 쪼르르 따르는 것처럼.


문제는 행운이 아닌 건 사실 티가 잘 나지 않아서 해봤자 한숨만 나올 때가 많다는 거다. 누가 알아봐 주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나조차 잘 모르겠을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영 티 나지 않는 그 작은 일들도, 어쨌든 쌓이고 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아는가. (모르면 어쩔 건데)


행운을 목 빼고 기다리지 않는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법으로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뜬금없지만 연말 시상식에서도 느꼈다. 불러주는 곳이 없을 때 직접 엑셀까지 배워 비보 TV를 만들었던 송은이. 무명 시절 재봉틀이며 꽃꽂이, 그런 잔재주를 익혀가며 바쁘게 살았던 박나래.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그 오랜 시간 동안 쌓았을 내공에 경외심을 느꼈다.


2019년에는 영 행운이 따르지 않았던 모두들, 이제는 그 싱거운 기분 툭 털었으면 좋겠다. 대신 티 나지 않지만, 성과도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공들여했던 일을 꺼내 떠올리며 스스로를 격려하자. 참 잘했어요.


밤을 꼴딱 새 버렸더니 잠이 너무 온다. 내일은 당차게 일어나 새해를 적극적으로 맞이해야겠다. 떡국도 좀 먹고, 새해를 기념해 주변 안부도 물어가며, 그렇게 삶을 긍정해야지. 복 많이 나누는 한 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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