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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나 May 19. 2023

[산티아고 순례길7] 론세스바예스와 그들의 따스함

#나의 첫 번째 까미노 이야기

초코바가 털렸지만 마음이 든든해졌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잠깐 신이 났다. 그리고 다시 나도 씩씩하게 걸었다.


열심히 걷다가 중년 남성 두 분과 23살 친구가 등산화와 양말을 벗고 쉬고 있었다. 

'와 로사나님 못 만날까 봐 걱정했어요'

'오히려 이렇게 난코스일수록 발을 잘 쉬어주어야 해요'


기다려도 기다려도 내가 계속 안 와서 걱정했다고 해주셨다. '나를 기다렸다.' 이 말이 정말 따스하게 느껴졌다. 따스함 이 세 글자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느꼈던 25살의 외로움 두려움 막막함과 너무나도 상반되었다. 그래서... 너무 낯설었다. 나를 위해 기다려준 이 세 명이 참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어색했다. '왜 나를 기다려주지?' 또 WHY가 튀어나왔다.


생각해 보면 나는 맹목적인 WHY 성향의 사람이었다. <기획의 정석>의 저자 박신영 기획능력자님도 WHY추구형과 WHAT추구형이 만나면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점을 언급했다. 맹목적인 WHY형인 나는 모든 현상에 동기와 이유를 붙였다. 이는 좋은 성과를 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일에는 엄청난 실의에 빠지기도 한다. 


'왜 나는 다문화 가정이지?'

'왜 내가 힘들게 얻은 장학금 가족 의료비로 들어가야 하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있지?'


때로는 조건 없는 선의와 친절이기에 '따스함'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인데, 모든 것에 의문을 갖고 파헤치고 스스로를 자책해 왔다. 그 세 명 동행자의 기다림과 친절함 덕분에 마침내 힘을 내어 론세스바예스 근처까지 올 수 있었다.


'어? 그 초코바 준 사람이죠?'

초코바를 빼앗아갔던 태극기 청년은 알고 보니 고급 DSLR을 가지고 있던 순례자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사진 한 장 찍어드릴게요.'

너저분한 옷차림, 지친 표정으로 사진 찍기에는 완벽하지 못한 모습. 하지만 론세스바예스의 풍경은 안 찍기에 아쉬운 완벽한 전망이었다. 


'네 대충 찍어주세요.'

그렇게 나는 27km를 걷고 죽음의 첫 코스를 마쳤다. 그리고 론세스바예스의 정상은 눈부시게 따스했다. 처음 걷기부터 초코바 사건(?) 중간에 느낀 따스함까지 몸이 피로한 것도 있지만 마음에서 느낀 충만한 여유 덕분에 푹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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