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시 최재천 교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강연의 제목은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 순수를 말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순수한 동심을 가진 아이? 순백의 천사? 간단히 말하자면 물을 떠올리면 됩니다. 아무것도 첨가되지 않은 순수 H2O. 몸에 좋은 미네랄이 첨가되었다 해도 그것은 순수가 아닙니다. 순수는 선악이나 좋고 나쁨의 개념이 아닙니다. 악마가 순수할까요? 네, 순수합니다. 100% 악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순수 악 그 자체인 악마는 순수합니다. 고로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라 함은 악하고 더럽고 못되고 비겁하고… 등의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까지 다 포함합니다. 고로 자연은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강의 얘기로 돌아오면 이러한 다양성에서 창의성이 발휘됩니다. 획일적인 사회에서 다양성이 발현되기는 매우 힘이 듭니다. 인간사회만이 아니라 자연계에서도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농가에 조류독감이 발생하면 우리는 거의 살처분을 통합니다. 그리고 그 발생원인을 철새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조류 독감을 옮긴 주체는 철새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잘못입니다. 가금류의 인공사육을 통하여 유전자 다양성이 결여된 알만 잘 낳는 닭을 만든 것이 그 발생원인이고 공장식 사육을 하기에 전염의 최적화를 이룬 인간의 잘못이라는 겁니다. 해충이란 개념도 자연 상태의 곤충이 인간이 한 가지 작물만을 광범위하게 짓다 보니 그 작물을 좋아하는 곤충이 늘어나게 되고 그러다 보니 해충이 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시절 서양의 많은 국가들이 식민지에 단일작물의 경작을 통한 농장 경영, 즉 플랜테이션 상업농장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하는데 그 단일작물의 가격이 폭락할 경우 대체작물이 없으므로 경제 전반에 부담이 됩니다.
총, 균, 쇠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Gerald Diamond) 교수는 "농업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선택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위해 대지와 숲과 동물 등 자연을 파괴했고 인간의 유휴시간을 없애고 착취계급을 만들어냅니다. 유발 하라리 교수 또한 그렇습니다. 수렵, 채집 시절의 다양한 영양분 섭취 대신 비록 식량수급은 용이해졌으나 단일작물생산에 의한 다양한 영양분의 섭취는 불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종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인간에 의한 단일 가축의 공장식 사육은 각종 바이러스에 취약한 사회적, 자연적 토대를 만듭니다. '종식(終熄)'이라는 것은 군사적 용어로써, 코로나 바이러스 종식이라는 것은 시간이 무척 많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자연은 원래 '다양성'을 늘려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끊임없이 분화하여 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에 역행하며, 질서를 부여하고 일사불란하게 만들고 싶다는 겁니다. "자연은 순수를 혐오하나 인간은 다양성을 혐오한다"
"열역학 제1법칙에 따르면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다.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이 열역학 제1법칙뿐이라면 다행이다. 에너지가 고갈될 걱정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탄 한 조각을 태우면 태우기 전과 후의 에너지 총량은 같겠지만 일부는 아황산가스와 기타 기체로 바뀌어 대기 중으로 흩어진다. 이 과정에서 사라지는 에너지는 없지만 이 석탄 한 조각을 다시 태워 같은 일을 하게 할 수는 없다. 일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무용한 에너지로 손실되고 만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법칙)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한다. 결국 우리는 에너지로 일을 할 때마다 일한 만큼 다시 쓸 수 없는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쓴 만큼 "일정액의 벌금을 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열역학 제 2법칙 엔트로피에 관한 설명이며 자세한 본인의 생각은 이미 브런치 글을 통해 밝힌 바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연은 이렇게 일종의 페널티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인간 세계도 마찬가지라서 우리나라 역사를 봐도 항상 이 엔트로피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의 개혁정치를 지나 경종의 반동정치가 시작되고 문벌귀족의 난립, 외적의 침입, 무인의 집권, 농민과 천민의 항쟁, 원의 침입 등 엔트로피의 증가는 고려의 붕괴와 조선의 발흥이 일어났고 태조, 정종, 태종의 개혁, 세종의 부흥기를 지나 세조의 왕위찬탈, 각종 전쟁, 전세제도의 문란, 세도정치, 각종 민란, 국권의 찬탈 등의 혼란이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가까운 예로 마땅한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TV를 많이 보지는 않으나 가끔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예능을 좋아합니다. 심각한 문제는 다양한 서적, 인터넷, 각종 다큐, 인터넷 카페 등을 통해 수시로 접하므로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넘기는 예능을 좋아하는데 아무리 재밌는 프로도 해를 넘기면 식상해지고 토크는 산으로 가고 산만해집니다. 오래가는 장수프로의 경우는 자체 포맷의 변화 등을 통한 내외부 충격으로 엔트로피를 상쇄합니다. 저는 그리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토요일 저녁을 책임졌던 무한도전의 경우 고정된 포맷이 아닌 버라이어티한 주제를 통해 자체 엔트로피를 낮췄고 다양한 시도, 창의성의 발현을 통해 장수 프로그램이 된 것입니다. 물론 매주 각기 다른 포맷은 관계자들에겐 심각한 스트레스였을 겁니다. 이외에도 각계각층에 종사하는 외부 게스트를 투입하여 엔트로피를 줄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될 수 있겠지요.
공장식 축산
유용한 에너지들이 무용한 에너지로 바뀌는 일련의 작용이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자연계에서 뿐 아니라 인간계에서도 어쩌면 개인의 의식 변용에 있어서도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이러한 혼란의 점증이 인간 의식의 발달과 양의 상관관계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달은 점진적인 일련의 연역적 방법이 아니 과학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환, 즉 귀납적으로 발달해간다고 합니다. 항상 변화는 위기 뒤에 찾아오며 의식의 발달도 단일 시점이 아닌 다양성이 표출되는 사회에서 이루어집니다. 단일성이나 양극성이 점철된 사회와 달리 다변화된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싹틉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는 아고라(agora)라는 하나의 시장, 플랫폼이 있는데 그 광장에는 돌로 된 단, 연설대라는 단이 있는데 영어로는 스피커즈 플랫폼(speaker's platform)입니다. 플랫폼이란 기차역에서 철로 옆에 사람들이 기차를 탈 수 있는 영역표시를 위해 지면보다 높게 한 단을 말하며 현대적인 플랫폼이란 주로 물리적인 영역과 달리 그 한계가 무한정인 인터넷에 존재하는 구글, 애플 같은 플랫폼 기업을 말합니다. 플랫폼 기업의 승패는 무엇보다 참여자 수로 대변됩니다. 그래서 사업 초기 고객 유치를 통한 투자의 적자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임계치에 달했을 때의 수익은 여느 SNS 기업보다 기하급수적입니다. 확률적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천재는 인구수 백만보다 인구수 천만에 더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연설대 speaker's platform
폐쇄적이고 군국주의였던 스파르타가 비록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전쟁은 이겼지만 천년이 지나도록 패전국인 그리스 아테네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은 아고라의 연설대라는 플랫폼에 누구나 올라가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다양성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군국주의라는 단일 순수성보다 다양성이라는 패러다임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입니다. 자연은 혼란스러운 듯 보이나 카오스 이론에 따르면 무질서와 혼돈 속에도 나름의 질서와 규칙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거시와 미시세계의 조화입니다. 순수한 음과 순수한 양의 음양의 세계가 아닌 양을 포함한 큰 음의 세계와 음을 포함한 큰 양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다양함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단일 속성들과 그들을 움직이는 다양한 법칙의 발견을 통해 엔트로피를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엔트로피의 증가를 통해 그 엔트로피를 극복할 수 있는 많은 법칙들이 산출되어 다양화되고 양적 질적인 사회의 발전과 인간 의식의 진화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다. 다양한 데이터의 축적을 통해 다양한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 사회가 발전하고 자연의 생존 방식이 달라짐에도 인간 집단의식의 변화는 그에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해서라도 다양함 속에서 표출되는 생각지 못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자연은 검은 백조를 원합니다.
※ 검은 백조(Black swan) - 검은 백조는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월가 투자전문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저서 '검은 백조(The black swan)'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언하며 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