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얘기를 하나만 하겠습니다. 초등학생 때 꼭두각시 인형극을 한 적이 있습니다. 긴 실이 매달린 십자가 모양 나무 조각을 움직이면 인형의 팔다리가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제 인형은 잘만 움직였지만, 친구들 인형은 실끼리 엉켜서 푸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예쁜 둘째 딸인 저는 아빠만의 꼭두각시입니다. 짧은 치마 대신 아빠가 좋아하는 청바지를 입습니다. 미니어처를 만드는 걸 좋아했는데, 전혀 다른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아빠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꼭두각시답게 잘 이루었습니다. 아빠가 사는 지역에 거처를 정했고, 월급을 받으면 아빠에게 낱낱이 공개했습니다. 아, 아버지가 왜 그러시냐고요?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자처했어요. 정말입니다.
이십 대 언저리가 되니 뇌가 커졌는지 아빠에게 반항을 했습니다. 어딜 가겠으니 당장 차에 타라는 아빠에게 "내가 아빠 꼭두각시야?" 아빠는 검지 손가락 하나를 제 얼굴 앞에 가리키며 "너 아빠 딸 아니야?"라고 묻습니다. 침묵을 선택한 저는 순순히 아빠를 따라 차에 탔습니다. 딸=꼭두각시. 아빠와 나 사이에 방정식이 하나 세워졌습니다.
1층으로 내려갔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그 직업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결심이었을까요. 4년이 지난 지금의 저는 그때의 저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집에 와서 아빠에게도 말하니 불같이 화를 내며 조용히 참고 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럴 거면 아빠가 다니지, 아빠는 다 그만둬놓고. 그 말은 마음 속으로 삼켰습니다. 전 착한 딸이 좋았거든요. 그 직업은 계속 다니게 됐습니다. 저는 식물처럼 점점 말라갔습니다.
배운 것은 온통 쓸모가 없었습니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고 배웠고, 생명은 죽이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음식은 남기면 안 돼,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거야. 거짓말. 왜 거짓말 하세요? 사람들은 모기를 죽이고, 꽃을 뜯어서 팔고, 그걸 보고 환하게 웃으며 좋아합니다. 그거 시체인데. 사후경직은 왔으려나요. 음식에 곰팡이가 끼었잖아요. 다 미워하고 죽이고 헐뜯고 밟아서 올라가잖아요. 그리고, 거짓말 하잖아요. 곰팡이같은 하얀 거짓말.
B는 어제 준혁이와 더 있다가 집에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입니다. "다 알고 있으니 그냥 말해 줘. 제발." 제가 사랑한 남자가,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 이토록 저급한 거짓말을 하고 마지막 결말을 맺게 될 리가 없습니다. B는 망설임 끝에 더듬거리며 입술을 엽니다. "이게 다야."
저는 궁금합니다. 이 남자가 만난 여자가 누구고, 왜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디까지 갔는지. 나와 나눈 약속들은 정말, 다 거짓이었는지. 하나하나 다 물어보고 따져들고 싶지만 B는 도저히 말할 생각이 없어보입니다. 말하게 만들고 싶습니다. 전 사실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기로 합니다.
서로가 너무 미워서 죽일 듯이 욕을 해도 이 남자는 결국 저를 다시 찾아와줍니다. 아침이 되면 출근하라고 전화를 해 주고, 불안해서 덜덜 떨 때 다들 왜 그러냐, 왜 그러냐 할 때도 이리 오라고 하며 그저 따뜻하게 안아줍니다. 갈 데 없어 누워있으면 귀신같이 어디 있는 줄 알고 찾아와서 집에 데려다줍니다. 자기가 화를 낼 땐 내가 수그리고, 내가 화를 내면 그가 수그립니다. 그새 여름이 찾아왔고 우리는 산으로, 강으로 놀러다녔습니다. 우리는 천생연분이었는데, 이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시시한 연애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쓴 건 아닙니다만, 이때부터는 점점 더 감정이 없어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B와 약속을 잡고 이디야 2층에서 만났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줄게. 여자 만나는 건 괜찮아. 그런 마음이 들 수 있지. 나를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특별히 여기는 걸 알고 있어. 당연한 본능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거짓말 하는 건 견딜 수 없어. 여기서 솔직히 말해야 나에게 신뢰를 주는 거야." 달콤한 말로 B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B는 정말 저를 사랑합니다. 이건 정말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는 나에게 신뢰를 주고 싶었을 겁니다. 무슨 이유였든지간에, 아마도요.
B가 어렵게 어렵게 얘기를 꺼내놓습니다. 저는 고개를 저었어요. 저는 B를 좋아했기 때문에, B가 꺼낸 이야기 말고도 다른 이야기가 더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다 말하고선 "정말 이게 마지막이야."라고 말해도 "더 있는 거 알아." 사실 몰랐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는 데 3시간이 걸렸습니다. 아! 어차피 저는 헤어질 생각이었습니다. B는 순진하게 저한테 속은 거에요. 어떤 희열감이 몰려옵니다. 승자의 깃발을 잡은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요? 포커를 칠 때 손에 A스페이스 카드가 들어오면, 아닌 척 했지만, 결국 내가 이긴 그 순간. 너희들 패 나보다 안 되지? 다음 판도 이길 것 같은 기분.
그 뒤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한 달에 스무 번을 넘게 만났는데, 저를 만나는 날이 아닌 날마다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는 내가 사귀기 전에 친한 동생이라고 소개받았던 여자고, 사실은 노래방 도우미였고, 어떻게 친구와 쿵짝짝 나에게 거짓말을 치면서 속였는지 알게 되는 그런 시덥잖은 스토리에요.
바로 헤어지자고 하면 너무 없어보이잖아요. 거짓말이라도 거짓말 안 같게끔 해야 마지막까지 완벽한 거짓말이 되는 거죠. 나는 솔직하게 말한 그를 용서했고, 표면적으로 우리는 계속 만나는 관계가 됐다가, 얼마 안 지나 진짜로 헤어졌어요.
나는 그를 많이 원망했습니다. 지나고 나니 정말 2019년의 나는 어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애가 맞았어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도 몰랐고, 아름다운 건 줄 알았고, 마음은 따뜻한 건 줄 알았고, 나쁜 건 고쳐지는 건 줄 알았어요. 그렇게 세상이 발전한다고 믿었던 저는 철저히 깨져서 부서졌어요. 왜 나를 사랑한다 했을까? 바람당한 여자들이 늘상 하는 생각을 똑같이 하면서 말이에요. 참 우습죠. 그래도 전 똑똑하고 현명한 여자니까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기로 했어요. 나 이 남자 괜히 믿었으니까.
아빠와는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블랙홀이 있어 따로 나와 살기로 했습니다. 저만의 공간도 필요했고요. 방구석에 처박혀서 술만 실컷 들이켰습니다. 최고의 술친구 B가 사라져서 헛헛했어요. 마녀는 더 이상 내 편이 아니었습니다. 썩을 것. 마녀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어요. 그저 내가 B에 알맞은 여자이길 바랐을 뿐. 거미줄이니, 소세지니 말장난을 주고받는 그들이 역겨웠습니다. 마녀는 다른 곳으로 이사갔어요.
저에겐 평화가 찾아올 거라 생각했습니다. 믿음, 희망, 기대, 이런 단어가 참 안 좋은 건데 말이에요. 저는 혼자 이겨낼 힘이 없었습니다. 아빠도 멀어지고, 아빠 대신이었던 B도 멀어지며 홀로서기를 시작해야 했어요. 이 스토리가 그렇게 홀로서기와 성장을 담아낸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심장이 빨리 뛰어 병원에 다니고 있던 저는 무너질 때마다 B를 찾았습니다. 이번만, 한 번만. B는 늘 그렇듯 찾아와줬고요.
역겨운 B, 내가 사랑하는 B. 재빨리 살아남을 수 있는 구멍을 살폈어요. 배신감에 괴로워하던 저는 더 심해지기로 했습니다. 세상보다, B보다, 내가 제일 악질이 되어야지. 너희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 아니냐고. '나 정말 착하게 살려고 했는데'라고 자조하면서요. 악질 중의 가장 악질은 사람을 기만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프가 한 번 밑으로 내려가면 좀처럼 올라오질 않습니다. 중력의 영향을 받나봐요. 저는 B를 좋아하면서, B에게 실망하면서, B를 기만하면서, B를 이용하면서, B에게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B도 다 느끼고 있었어요. 복수심으로 호빠도 가고 싶었는데 그건 실패했어요. 노래방 여자가 될 깜냥은 안 됐고요.
B와 함께 한 로터리에서 곱창에 소주를 기울이던 날, 저는 동창의 연락을 받고 번화가로 나갔습니다. B는 못마땅했지만 저에게 뭐라 말 할 처지가 안 되었겠죠. 꼭두각시 인형극을 함께 했던 친구. 직업군인을 하다가 이번에 전역했다는 친구는 통통했던 것 같은데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근처에 산다는 친한 형을 한 명 데리고 나왔습니다. 눈이 쫙 찢어져 있고, 키가 작고, 실실 웃으면서 내 몸을 훑는 형. 그 형은 하회탈처럼 휘어지는 눈으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 니한테 이런 친구가 있었나? 신난다 오늘 이 술집에서 제일 예쁜 여자랑 술 마시네. 사람들 다 우리 부러워할껄? 내 어깨 펴지는 거 보이제? 한 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