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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3. 2016

두 번의 죽음과 한 번의 삶

-박훈정 감독의 <대호> (2015)

   느릿하지만 묵직하고 아득하면서도 웅장하다. 박훈정 감독의 영화 <대호>는 CG기술로 구현된 조선호랑이의 모습도 볼거리이지만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관객에게 말을 거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좋다. 최근 영화들은 숏과 숏 사이의 간격을 줄이고 빠른 카메라의 이동을 통해 관객의 시각을 매혹시켜왔다. 이러한 카메라의 표현 방식에 익숙한 일부 관객들에게 영화 <대호>는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객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전개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카메라의 이동과 움직임 그 자체의 속도는 영화가 말을 거는 방식이고 사물과 세계를 대면하는 하나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속도감 있는 빠른 편집을 했다면 영화 <대호>가 더 많은 관객의 호평을 받았을까? 그랬다면 대호의 강력한 신력(神力)은 강조되었을지 모르지만 만덕과 대호를 둘러싼 주변 복선의 의미는 축소되었을 것이다. 


   영화 <대호>에서 조선 최고의 명포수 만덕과 신력을 지닌 대호의 목숨을 건 화려한 대결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포기하기를 권한다. 이 작품은 사냥의 성공 혹은 실패에 관한 모험담이 아니다. 오히려 사냥의 불가능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일제강점기 총을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포수들이 있고 일제가 그들을 이용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아들인다는 설정 자체가 ‘존재’의 문제를 불러들인다. 복잡한 존재론으로 넘어갈 필요는 없다. 포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총’이 아니라 ‘사냥감’이라는 사실만 알면 된다. 포수는 어디까지나 ‘사냥감’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포수이다. 이런 맥락 조선의 ‘대호’를 향한 포수들의 총부리는 생존이 아니라 자기 상실을 향한다. 영화 <대호>는 사냥감의 포획이 아니라 사냥의 불가능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리적으로 가까운 근현대사를 다루다보면 영화는 이분법적 구도로 구성되기 쉽다. 하지만 영화 <대호>는 시종일관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조선제일포수인 만덕이 ‘산’을 대하는 태도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대호의 존재는 관객의 시선을 끌기위한 장치이며 정작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상실되어가는 전 근대적 세계상이다. 만덕이 경외하는 ‘산’ 혹은 ‘자연’이란 아름다운 전원이 아니다. 설산의 장막 너머에는 혹독하고 치열한 삶의 순간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곳은 포수나 사냥감이 생사를 걸고 다투는 공간이며 일방적인 강자나 약자도 없다. 산에서는 노련한 포수라도 죽음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 같은 사실은 설산의 죽림(竹林)에서 만덕과 대호가 맞대결하는 장면에서 나타난다. 만덕의 실수로 대호를 향해 쏜 총이 자신의 아내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갈 때 조선제일의 포수 만덕은 죽음을 맞는다. 영화 속에서 죽음이 갑작스럽게 얼굴을 내민다. 


   그 순간부터 육체는 살아있지만 과거 조선제일포수 만덕은 죽었다. 아내의 죽음 이후 만덕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붙드는’ 것에 가깝다. 포수 만덕은 상징적으로 죽었으며 그는 상실된 존재 근거를 아들 석이에게서 찾는다. 하지만 만덕의 상징적 죽음을 사람들은 승인하지 않는다. 조선인 포수대 대장인 구경이 찾아와 대호를 붙잡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나, 만덕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의 아들 석이를 포수대의 대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 누구도  포수 만덕이 죽었음을 승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석이는 대호 사냥에 나서고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만덕에게 찾아온 두 번째 죽음이다. 이제 만덕의 상징적 삶의 근거들은 모두 소거되었다. 


           

   영화는 만덕이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을 대호와의 대면으로 보여준다. 서로 눈길을 맞추는 순간 묘한 울림이 일어난다. 만덕이 연민의 눈으로 대호를 응시하기 때문이다. 상처입고 숨을 헐떡거리는 대호는 만덕의 내면을 외부로 투영하는 거울이 된다. 영화는 서서히 만덕과 대호가 정서적으로 감응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대호는 일본군에 의해 자신의 동반자와 새끼들은 사냥 당했으며 삶의 터전인 숲을 훼손당했다. 만덕의 현실도 다르지 않다. 자신의 생명과 다를 바가 없는 아들 석이를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폭력의 세계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 이후에 영화는 만덕과 대호가 단순히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 내에서 공존하는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에필로그 형식으로 확인시켜준다. 만덕이 성혼하고 가정을 이루어 아들 석이를 순산하고 기쁨을 누리는 장면과 대호가 짝을 이루고 새끼들을 돌보는 장면을 교차적으로 편집함으로써 다른 두 개체가 세계 내에서 동일한 삶의 궤적에 나란히 놓여있음을 환기한다. 즉 그들은 하나의 세계에 공속하여 있다.  


   만덕은 아들 석이의 시신을 거주하던 오두막과 함께 화장(火葬)한다. 대호와의 대결 결과와 상관없이 그는 죽음을 작정했음을 암시한다. 이후 영화는 만덕을 따라 산정상의 휘날리는 눈발과 가파른 설산의 풍경으로 표현되는 숭고한 신의 영역 혹은 순수한 초월적 정신의 영역으로 관객을 이끈다. 마침내 만덕은 결투 장소에 도착하고 대호와 다시 대면한다. 이때 만덕은 대호를 향해 절을 올린다. 이것은 만덕이 대상에게 존중을 표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과거 조선인들이 대호를 산군(山君)으로 부르듯 마지막까지 만덕에게 대호는 사냥감이 아니라 산군인 것이다. 그렇게 둘의 대결은 시작되고 서로 뒤엉킨 채 절벽에서 추락한다. 이 순간 상징적 차원에서 의미의 역전이 발생한다. 이제 일제의 대호 ‘사냥’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다. 대호라는 ‘사냥감’이 사라지기에 대호가 일제에 ‘사냥’당하는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만덕의 사냥은 대호를 산신(山神)으로 여기는 조선 고유의 정신이 훼손당하는 일을 유예한다. 그들은 육신이 살아서 죽기보다, 죽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는 것을 택한다. 마지막 만덕과 대호의 죽음은 그들의 삶을 완성시킨다.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 <대호>가 의도하던 그렇지 않던 관객에게 어떤 고유하고 시원적인 정신세계에 대해 말할 때 끼어드는 불편함에 관해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대호의 세계를 순수한 탈주의 세계로 읽을 수 있을까? 영화 <대호>의 소재와 만덕의 삶의 주변에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재현된 세계가 암시하는 시원성은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 영화 <대호>가 재현하고 있는 민족 고유의 정신세계는 근대 사회에서 상실된 것이라 여겨지는 것, 애초에 상실한 적이 없지만 누군가에 의해 ‘상실’ 당했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대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 현재와 다른 상실된 어떤 고유의 정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욕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 근대적인 것 혹은 근대에 부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관점은 이미 근대적인 세계상을 기준으로 한다. 그러므로 영화 <대호>에서 근대화된 세계 속에서 상실되어가는 전 근대적인 고유한 조선의 민족혼은 근대적 관점에서 고안한 가상이란 의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영화 <대호>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호랑이 사냥이 민족혼을 말살하려는 의도로 일어났다는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상상적인 방식(사냥의 불가능성)으로 그것의 부정성을 환기시킨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손쉬운 민족주의적 감정에 역사적 사건의 부당함을 호소하기보다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몰락해가는 세계의 우울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한다. 일제의 부질없는 대호 사냥에 동원되어 아끼던 아들 석이가 무의미하게 희생될 때의 분노와 무력, 어떠한 희망도 없이 무너져가는 세계를 바라만 보아야 하는 처연함이 영화의 신비하지만 차가운 설산의 풍경과 더불어 채색된다. 이렇듯 영화 <대호>는 식민지 근대화의 공간에 존재할 수 없는 것 항상 부재로만 지시되는 어떤 것(이 작품에서는 민족혼이나 순수한 정신 등)에 대한 존재성을 관객들의 정동에 호소하여 설득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식민지 근대화의 결핍 혹은 동일화시킬 수 없는 근본적 공백이 전(前)-의식적 차원에서 우리의 신체 혹은 내부에 존재한다는 점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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