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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y 21. 2024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정우신론 

  1.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정우신은 201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지금까지『비금속 소년』(파란, 2018) 『홍콩 정원』 (현대문학, 2021)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아시아, 2022)라는 세 권의 단독시집과 『도넛 시티』(은행나무, 2020)라는 공동시집까지 다수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 그동안 다수의 작품을 창작해 온 정우신의 시 세계를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시들이 신유물론에서 제기하는 비인간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신유물론이 객체인 물질의 존재론을 추구하며,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기초로 하는 상관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객체는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공간에 편재되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다. 대신 물질은 그 자체의 내적 역량을 가지고 스스로 변화하고 변형되는 능동적 대상이다. 이러한 신유물론의 관점에서 인간 또한 자기를 변화시키고 있는 객체이다. 즉, 인간 주체가 다른 객체에 가지는 우월성이 사라지고, 인간과 객체는 나란히 평평한 존재로 나란히 서는 것이다.

  시인은 첫 시집『비금속 소년』(파란, 2018)에서 생물학적 상상력에 기초해 주체와 세계의 관계를 탐구한 바 있다. 인간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체는 세계를 구성하는 세포에 가까운 물질로 다루어진다. 이것은 마치 거대한 내연 기관과 그것을 구성하는 금속의 관계와 같다. 그에게 세계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인간적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기관’이라면, 인간은 그것에 따라 움직이는 ‘신체’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 개체의 고유성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세계에서 사물과 나 사이의 구분은 사실상 상실된다.

  또한 두 번째 시집 『홍콩 정원』 (2021) 과 공동시집 『도넛 시티』(2020)에서 시인은 주체와 타자의 이분법적 구분이 불가능한 사태를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주체의 원본성이 상실되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인 리플리컨트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의 시세계에서 ‘나’와 ‘선생’ 그리고 ‘리플리컨트’ 는 존재의 평면을 공유하며, 서로의 자리를 바꾸며 미끄러지고, 단일한 의미로 규정되지 않는 어떤 실재의 장소를 가리킬 뿐이다. 나와 선생 그리고 리플리컨트의 뒤얽힘은 지금 여기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며, 순수 사건의 생성으로서 폭발력을 보여준다.

  시인은 두 권의 시집을 통해 신유물론적 사유를 밀어붙이고 있다. 하지만 신유물론적 사유로 배제할 수 없는 인간의 개념을 제거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순수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을 다른 객체와 수평적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개체의 존재 방식은 자본의 원리와 문명 내 사회 안에서 존재하는 이상 인간의 개념은 배제되거나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물론 넓은 생태학적 차원에서 인간과 주어진 외부 환경의 연결 관계를 사유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관점이 아니라면, 정우신의 세 번째 시집『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는 이해될 수 없다. 신유물론적 사유를 밀어붙이며 자신의 시 세계를 촉진하던 시인이 서정적인 사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인간과 비인간은 자웅동체가 아닌가? 사실 변화의 조짐은『홍콩 정원』의 제2부 「변전소 –리플리컨트 폐기」라는 작품에 암시되어 있었다. “우주에서/ 사랑으로 위치 변경”이나 “나의 전류가/ 혼자인 아이의 방에 있는/ 스탠드에 무심코 가닿듯// 사랑이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우주’가 비인간 객체의 세계에서 ‘아이’가 의미하는 일상과 경험적 차원으로 시선이 위치 이동할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시인의 시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변모 양상을 중심으로, 시인의 시 세계가 변모하는 과정과 그의 시에 숨겨진 인간적 고뇌를 삶의 견인주의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2. 견인주의적 삶의 태도와 탈주의 잠재성      


  시인은 첫 시집『비금속 소년』에서부터 세계를 생물체의 거대한 내면으로, 주체를 그 세계의 신경계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세계는 결국 거대 생물체의 내면”이고, 주체 “신경계”(「원숭이 연극」)일 뿐이다. 더구나 그 생물의 세계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상관이 없어서 무서운 이웃”(「희생양』)들로 가득하다. 

  시인이 신경계로 복무하는 세계에서 이웃들이 무서운 이유는 그가 복무하는 세계가 무관심과 관계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계에 대한 거부감을 시인은 “인간은 진화하고 사회는 발전한다?” (「희생양」) 라는 직접적인 의문의 방식으로 드러낸다. 시인은 인간과 사회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품은 근대 사회를 향한 불신을 품고 있다. 그에게 근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고통을 연구하는 동물”(「천사는 아니지만」)일 뿐이다. 하지만 “삶의 끝// 부엌을 정리해야지/ 머리를 감고/ 속옷을 삶아야지”(「선인장이 있는 자화상」)라는 언술에 나타나듯이 시인은 삶의 끝에서도 주어진 일상을 지속하는 견인주의적 자세를 견지한다. 

  이러한 견인주의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시인에게 어쩌면 탈주(脫走)의 시도는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탈주란 간단히 말해 도주이다. 말 그대로 몸을 빼서 달아난다는 말이다. 하지만 탈주는 변신이 아니다. 변신은 주체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라면, 탈주는 내외의 압력으로부터 어쩔 수 없이 자기 존재를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탈주는 새로운 것을 구성하기 위한 생성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의 탈주는 자기 존재가 미시적으로 변모해 가는 잠재적 존재라는 사실을 수동적으로 인지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바위를 조금씩 옮기는 이끼

누구였을까


수직으로 시작되는 자유

바위는 모든 가능성을 열고 기다린다     

 

-「녹색의 눈」부분      


탈주를 시도하는 바람들, 열매들, 아이들, 저수지에 밭을 담그고 있는 구름은 물이 쏟아지지 않도록 바닥을 돌고      

버드나무를 확장하고 있는 것     

 

-「이차원 산책」부분


북을 두드리며

우리가 사라진 곳을 찾아봅니다 

나와 그대

이제 

무엇이든 될 수 있나요     


-「토템」 부분     


  시인은 “바위를 조금씩 옮기는 이끼”와 “수직으로 시작되는 자유”로 표현되는 힘의 작용을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바위와 같은 심정이 되어 “모든 가능성을 열고 기다린다.” 그 힘들은 “바람들, 열매들, 아이들, 저수지에 발을 담그고 있는 구름”과 같은 다양한 양태로 변용되어 나타나며,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잠재되어 “버드나무를 확장하고” 있다. 즉, 시인의 견인주의는 삶의 무조건인 인내를 당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외압의 작용으로 인한 자기 존재의 내적 변화와 생성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탈주와 변용의 사유는 “나와 그대/ 이제/ 무엇이든 될 수 있나요”라는 구절에 나타나고 있듯이 나와 그대(타자)의 구분이 상실되고 그것은 끝없이 ‘무엇 되기’의 과정을 되풀이한다. 나와 타자의 구분이 사라지고 끝없이 변화하는 세계는 무수한 되기의 과정이 예정되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홍콩 정원』과 공동시집 『도넛 시티』에서 ‘나’와 ‘선생’ 그리고 ‘리플리컨트’라는 세 기표가 그 위상의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선생은 절을 마치고 

관으로 돌아가 누웠다     

향이 끝나갈 때쯤 살냄새가 났다      

불이 꺼진 적이 없던 

가마솥

무엇이 들었는지 모른다     

삼동내 개들은

장작 연기의 방향에 따라 

짖었다      

… 중략 …      

사람들은 항아리에 새끼를 낳고 찾아가지 않았다      

나는 미닫이 창문을 굳게 닫고 

선생이 나비로 살아가길 기다렸다     

 

-「不二門 -건봉사의 항아리를 정리하는 비구니 리플리컨트」 부분     


  이 시는 분명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떤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사건의 진실은 아직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항아리에 새끼를 낳고 찾아가지 않을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궁핍한 상황인지 상상이 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인지 알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우울한 사건을 진술하고 있는 시적 화자가 누구인지도 불명확하다. 

  ‘나’라는 시어가 1인칭 대명사임을 고려한다면,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나’로 파악되어야 하지만, 이 시는 제목에서 항아리를 정리하는 비구니 리플리컨트의 이야기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상황은 복잡해진다. 그럼 나=리플리컨트인가? 아니면 나≠리플리컨트인가? 더 나아가 만약 나=리플리컨트라면 정작 그 리플리컨트의 원본으로서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되묻게 된다. 나와 리플리컨트의 관계는 이 물음 속에서 착종(錯綜)되고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의 순환 구조가 전면에 나타난다. 

  즉, 이 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나와 선생 그리고 리플리컨트 사이의 복잡한 얽힘뿐이다. 이러한 얽힘을 통해 세 주체의 관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그 관계의 함수는 증식된다. 인용된 시의 제목을 통해 비구니 리플리컨트가 발화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고, 아니면 리플리컨트와 나를 구분되는 주체로 읽을 수 있다. 그로 인해 리플리컨트와 나 그리고 선생의 관계도 복잡해진다. 이렇듯 시인의 시에서 주체의 중심성은 해체되고 비인칭 객체들 사이의 무수한 관계들만 증식된다.

  시에서 "불이 꺼진 적이 없던/ 가마솥/ 무엇이 들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항아리에 새끼를 낳고 찾아가지 않았다."라는 진술에서 서늘한 감수성이 느껴지지만, 가마솥이나 항아리에 들어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다. 항아리에 사람들이 새끼를 낳았다고 했으니 사람의 아이일까? 그런데 사람의 아이를 새끼라고 칭하는 것은 어색하다. 그럼 동네를 돌아다니는 개인가?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시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가마솥과 항아리 그리고 관(棺)에 무엇인가 들어있고, 시적 화자 또한 어딘가에 들어가 ‘선생’이라는 존재가 나비로 살아가길 기다리고 있는 과정이라는 점뿐이다. 이 시는 처음에 “선생은 절을 마치고 / 관으로 돌아가 누웠다”로 시작하였다. 관에 들어간 ‘선생’에서 시작된 연상이 뒤이어 ‘가마솥’ 이야기로 전환되고, 역시 ‘항아리’로 연상은 이어진다. 즉, 기표의 연쇄적인 순환 과정만 드러나며 그 내부에 비구니, 선생, 새끼라고 호명되는 어떤 무엇이 있을 뿐이다. 연쇄되는 기표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라고 지칭할 수 없는 대상인 구멍 그 자체가 부각된다. 이런 점에서 앞의 시는 의미의 지연 과정 그 자체가 시적 대상이자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둘러앉아 씹고 있던 뼈를 뱉었다      

맑고 푸르스름한 구슬이 박힌 

무당의 이마 


보라색 천으로 덮여 있다     

 … 중략 …     

 막 땅에서 나온 지렁이 같은 것


 대책 없이 죽겠지


 사랑은 피를 나르다가 

 피가 되고      

 점괘가 완료되기 전      

 마을 사람들 

 할복한다.      


  -「무당 – 신내림을 연습하는 리플리컨트」 부분      


  다시 위의 작품을 살펴보자. 이 작품도 역시 시적 화자는 마을 사람일 수도 있고, 리플리컨트일 수도 있으며, 무당일 수도 있다. “우리는 둘러앉아 씹고 있던 뼈를 뱉었다”라는 구절에서, ‘우리’라는 대명사는 시적 화자가 시 내부의 풍경 안에 분명 자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시를 읽어보면 “대책 없이 죽겠지”라는 진술의 주체가 누구인지 불명확하다. 그런데 곧 뒤이어 “점괘가 완료되기 전/ 마을 사람들 할복한다.”라는 구절이 이어진다. 이 작품도 주체의 중심성은 해체되어 있으며, 시적 대상들 사이의 복잡 미묘한 얽힘만이 전면화되어 드러난다.

  시적 주체가 누구인지 불명료한 가운데 발화된 시적 사건을 논리적 순서로 재구성하면 어떤 풍경들이 무당의 점괘에 의해 의미화되기 직전 ‘마을 사람들의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무당의 점괘가 실현되는 것이 불가능해져 의미의 완료가 실패하는 상황이다. 즉, 이 시는 대상의 의미를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의미화의 불가능성을 전면화한다. 

  이렇듯 시인의 시는 어떤 의미화가 불가능한 미완료 상태의 세계상을 드러내고 완료된 의미로 세계가 규정되거나 고정화되는 것을 거부한다. 어떠한 순수 사건이 폭발적으로 발생한 풍경을 단정한 언어로 포착하고 생성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규정된 의미로 환원하거나 단일한 주체의 관점으로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그것의 한 해명으로서 리오타르가 언급한 숭고의 미학적 개념에 기대보는 것은 어떨까.

  숭고의 미적 개념을 철학적으로 해명한 칸트에 의하면, 숭고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대상에서 비롯하는 감응으로서 불쾌한 감정이 쾌로 변화될 때 발생하는 미로 보았다. 바로 상상력의 범주가 포착하지 못하는 인식 불가능한 대상 앞에서 느끼는 불쾌감이 역설적으로 경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칸트의 숭고미를 리오타르는 표상 불가능성을 표상하고자 시도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미학의 원리로 해명한 바 있다. 

  이 같은 표상 불가능성을 표상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미학을 리오타르가 숭고미의 개념을 확장해 해석한 것처럼, 우리는 정우신의 시의 표상 불가능성 혹은 순수 사건의 생성이 지닌 폭발력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이 규정된 의미로 표상하기를 거부하는 정우신 시의 미적 방법론이 숭고 미학의 한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 삶의 무상성과 소진(消盡)의 의미      


  그렇다면 왜 시인이 묘사하는 풍경들은 의미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전면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미화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 아래에는 시인의 죽음에 대한 자의식이 놓여 있다. 평소 우리의 일상은 어떤 고정된 질서와 규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본래적 사태에 불과하다. 어디까지나 삶에 전면화된 규정적 질서와 의미들은 존재의 본래 사태로서 죽음을 감추는 잡담에 불과하다. (하이데거) 

  정우신의 시 세계는 비본래적 사태로서 일상 곳곳에 은폐된 죽음에 대한 자의식이 나타난다. 시인이 응시하는 죽음은 세계 곳곳에 퍼져있다. 그것은 “박제된 새처럼 / 마음이 얇아지는 날은 벌레들의 소리”(「네온사인」 부분)로 들려오는 청각적 심상으로, “죽고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 사랑하는 것이/ 쓸모없어지는”(「쥐 인간」부분) 성찰적 과정의 일부로 진술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죽음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직 현실이 아닌 도래하지 않은 관념적 대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앎은 어디에서 얻어질까. 그것은 타인과 관계된 삶의 차이 속에서 내 삶의 전체를 다시 돌아보는 과정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시인에게 죽음은 타인과 관계하는 “고통 속에서 상대성이론”(「생화학교실-리플리컨트의 탄생」부분)으로 나타난다.      

내가 위태로울 때면 너는 따뜻한 술잔을 들고 꿈에 나타났다 우리는 머나먼 바다까지 흘러가기도 하고 사냥당한 염소 가죽을 뒤집어쓰고 별을 바라보곤 했다 


침낭 지퍼를 머리끝까지 잠그고 죽음의 두께에 대해 생각했다     

네가 먼저 갔듯이 눈발은 발자국을 오래 남기지 않는다 기도를 하다가 멈추면 눈이 쌓이는 소리가 더 잘 들린다      


-「베이스캠프」 부분 


  시인에게 죽음은 주체를 감싸고 있는 어떤 조건이자 전제이다.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사냥당한 염소 가죽”이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나타나며, ‘나’는 염소 가죽(죽음)을 뒤집어쓰고 있다. 즉, ‘나’에게 죽음은 염소 가죽의 모습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물질처럼 경험된다. 내가 경험한 죽음은 실재적 두께롤 지니며, “기도를 하다가 멈추면 눈이 쌓는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온다. 먼저 떠나간 ‘너’를 생각하며 기도하는 순간에도 망자의 발자국을 지우는 눈처럼 죽음은 가까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를 무로 되돌리는 죽음은 삶의 거점(베이스캠프)이기도 하다.    

  

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은 절차 없는 긴 장례식이었지 우리가 걷는다는 것과 먹어야 한다는 것 계속 자야 한다는 것     

동정과 비난의 환희 속에서 숲과 하천과 산책 길 그리고 울음 속에서      

죽음이 나를 이미 다 파먹어서 죽을 수가 없네      


-「익산 가는 길」부분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삶은 절차 없는 긴 장례식”이며, “죽음이 나를 이미 다 파먹어서 죽을 수가 없”다고 말이다. 죽음은 “우리가 걷는다는 것과 먹어야 한다는 것 계속 자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 삶 전체를 포괄한다. 이 같은 시적 진술은 삶과 죽음은 분할될 수 없으며, 삶이란 죽음의 지속일 뿐임을 암시한다. 삶 자체가 죽음의 과정이라는 것을 젊은 나이에 통찰한 시인에게 세계란 자연스럽게 실낙원(失樂園)의 모습으로 현상되어 나타난다.    

  

도시를 병원으로 

모래와 신념은 지하로 

서늘함은 

복도의 피

비린내를 끌어들이는 강가로      

나는 영혼들과 기름이 엉켜 있는 항구에 걸터앉아      

석양을 이리저리 깎아본다     

… 중략 …     

또다시 생이 올 줄 몰랐네 나는 당신과 생일을 바꿨지 수산시장 32호 뜯어진 전기장판의 전선처럼 핏줄이 흐물거리네 빠져나가지 못하는 전류 때문에 팔목이 저리네      


-「失樂園」 부분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실낙원의 풍경은 어떠한가. 도시는 병원과 다를 바가 없고, 품었던 신념은 모래가 되어 지하로 묻혀버리며, 복도 주변은 그거 피와 비린내로 가득한 부정적 공간으로 묘사된다. 삶은 죽음이고, 죽음은 고통이며, 세계는 병들어 있다. 이 같은 실낙원의 세계는 존재의 본래성이 상실된 공간이다. 

  그리고 비본래적 실존의 공간 내에서 살아가는 존재자의 모습은 “번식에 실패한 인간”(「암시장 –만리포 여관에 버려진 리플리컨트」)이거나 혹은 “진화를 거듭한 지식인들”로 “해안가에 모여 침을 흘리고 있”(「마리화나 소년 -리셋된 자신에게 머신건을 쏘는 리플리컨트」)는 속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의 눈에 인간이란 실패를 거듭하다가 이제는 불구의 신체가 되어버리거나, 지식인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해안가에 앉아 침을 흘리고 있는 속물에 불과하다. 시인에게 세상은 속물들이 삼삼오오 모여 살아가는 병든 도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 같은 시인의 세계관을 중심으로 현실 세계를 되돌아보면, 과연 증기 기관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산업혁명의 결과가 우리 삶의 진화를 이끌었다고 설명할 수 있는지 되묻게 된다. 근대 사회가 약속한 진화와 발전의 유토피아는 우리에게 여전한 빈곤과 상실의 경험으로 되돌아왔고,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 이후 종교적 구원의 가능성마저 소실한 사회에서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란 현실을 죄의식을 품고 끝없이 인내하거나 아니면 속물로 살아남아 세속에 영합해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시인의 시는 세계에 대한 부정에 머물지 않는다. 몰락하는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시인은 “석양을 이리저리 깎아”보고자 시도한다. 다시 말해 시인은 저녁 무렵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몰락의 시간’을 ‘모색의 시간’으로 전환한다. 석양을 이리저리 깎는 행위는 일종의 자발적인 소진(消盡)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진의 의미는 현실을 인내하는 것도, 혹은 속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피로는 사회와 제도에 의해 개체가 지닌 역량을 상실하는 과정인데, 반면 소진은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의 역량을 발산함으로써 사회와 제도의 억압을 초월하고자 하는 순수한 강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 

  이 같은 모색의 소진 과정을 통해 시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또다시 생이 올줄 몰랐네 나는 당신과 생일을 바꿨지 수산시장 32호 뜯어낸 전기장판의 전선처럼 핏줄이 흐물거리네 빠져나가지 못하는 전류 때문에 팔목이 저리네.” 이때 팔목을 따고 흐르는 전류란 무엇인가. 바로 생명의 약동하는 힘으로서 삶의 긍정과 사랑을 의미한다. 전류로 인해 팔목이 저리는 고통의 감각은 삶의 의미가 소거된 병적 세계로부터 역설적으로 주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려오는 생명의 감각이다.      


     

  4. 사랑의 전류실험           


  시인에게 사랑은 전류의 형태로 이어지고 흐르고 전환된다. 변전소란 무엇인가 바로 전류가 수용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전압과 전류의 성질을 바꾸는 시설이다. 그리고 시인의   시 세계에서 전류란 바로 생명의 약동하는 힘 그 자체이다. 전류의 성질은 끊임없이 운동하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며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힘이다. 전류는 사람과 사람을 잇고 다른 누군가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이어지는 사랑의 은유이다. 


작은 숨을 고르며 

잠을 자듯 

무너진 둥지에 

지푸라기가 놓이듯      

나의 전류가

혼자인 아이의 방에 있는

스탠드에 무심코

가닿듯           

사랑이 유전되고 있는 것이다.  


 -「변전소 –리플리컨트 폐기」 부분  


  앞서 실낙원(失樂園)에서 시인의 팔을 저리게 했던 전류는 “혼자인 아이의 방에 있는 / 스탠드에 무심코 / 가닿”는다. 전류의 흐름을 통해 사랑은 나에게서 아이에게로 다시 유전되고, 다시 아이에게서 다른 누군가에게로 사랑의 유전은 반복된다. 그리고 이러한 반복되는 사랑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의 시집『홍콩 정원』 속에서 등장하는 주체들은 정작 부모로부터 사랑을 되돌려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부모로부터 되돌려받지 못한 사랑을 혼자 방에 있는 아이로부터 돌려받는다.      


반딧불이 가득한 뒷길이다 

돌에 맞은 개구리를 집어삼키고 있는 뱀 ……

슬픔이 몸뚱이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그 몸뚱어리 속에서 허물을 벗고 있는 것이냐 

우리의 공통점은 아비가 종이었다는 것

일찍 잃었다는 것      

  … 중략 …     

할머니가 시집올 때 해 온 목화솜 이불 

옆방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가 엄마가 아니었으면 

개들은 골목에서 혀를 내밀고 …… 내밀고 ……     

-「廢家 -머신러닝 5」부분      


  이처럼 부모의 사랑은 시인에게 상실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부모란 아이가 자라면서 받아들일 상징계의 법이나 제도를 의미하는 상징이다. 그런데 시인은 “아비가 종”이고 더군다나 “일찍 잃어”버린 상태이다. 그리고 옆방에서 엄마는 신음을 흘리고 있으며, “개들은 골목에서 혀를 내밀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와 같은 두 이미지의 겹침은 자연스럽게 수간(獸姦)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부모로 상징되는 규칙과 의미가 파기되고 이면에 도사린 오염된 이미지가 전면화된다. 아브젝트(abject)로서 오염된 이미지는 기성의 균질화된 세계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전환한다. 오염된 이미지들을 배제하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의 과정은 역설적으로 주체를 규정하고 의미화하는 힘을 불균형하게 만드는 잠재된 힘이 된다. (크리스테바) 바로 이러한 불결함은 비도덕이 아니라 도래할 사랑을 위한 조건이 된다. 그리고 부모라는 존재를 통해 사랑을 돌려받지 못하던 시인은 마침내 자신을 닮은 아이를 통해 사랑을 발견한다. 자신이 누군가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타자를 통해 그 사랑을 되돌려받는 순간인 것처럼, 사랑은 타자를 통해서만 되돌려받을 수 있다. (라캉) 이처럼 시인이 실낙원의 세계를 견디는 힘은 아이에게 되돌려받은 사랑이다.           



  5. 수직적 상승과 융합의 세계       


  시인은 세 번째 시집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에서도 사랑의 전류실험을 지속한다. 그가 마주하는 산책길의 세계는 넝쿨-꽃잎-풀-나무-잡초와 같은 시어들이 만들어 내는 식물의 이미지와 빗소리-호수-물가-저수지와 같은 시어들이 만들어 내는 물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세 번째 시집에서 식물의 이미지가 주로 수직적 상승의 이미지를 통한 견인주의적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소재로 활용된다면, 물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존재들이 뒤섞이고 변형되는 융합의 힘으로 나타난다. 


나는 나뭇잎처럼 

색을 바꿀 수도 없지만

떨어질 곳도 없지만     

당신과 나란히

날아보는 연습을 합니다.  

   

-「사거리 꽃집」 부분    

  

아버지의 한 손에는 청테이프가 들려 있고     

다른 손은 바닥에 놓여 있네요     

우글거리는 나뭇잎들 ……     

어디선가 백합향이 훅 끼치듯     

아버지 몸속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고목」부분      


  위의 시들을 살펴보면 나무의 이미지는 보는 것처럼 “당신과 나란히 날아보는 연습을” 하는 수직적 이미지와 겹쳐 나타나고 있으며, 고목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고된 삶은 우글거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불어오는 백합향으로 의미화되고 있다. 이처럼 나무를 포함한 꽃과 같은 식물의 이미지는 타자인 ‘당신’을 발견하고 함께 현실을 고목과 같이 견디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하는 시적 이미지로 활용된다. 반면 물의 이미지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뒤얽힘과 융합을 나타내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풀과 뱀이 섞이는 것이 사랑이다

적어놓고

잠시 

당신을 잊고 있습니다.  

   

-「물가에서」부분   

  

당신은 나를 까놓고 

저수지로 돌아갑니다     

피부에 

물이 닿을 때마다 

전기가 돌아요


-「사랑과 환경」 부분     


  시인이 산책하는 물가에는 “풀과 뱀이 섞이는 사랑”이 발견되고, 저수지에는 여전히 “피부에/ 물이 닿을 때마다/ 전기가 돌아”다닌다. 이때의 전류는 상처가 아니라 두 번째 시집의 전류실험을 참고하면 사랑의 유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사랑은 “빗소리를 듣다가/ 콩나물을 다듬”는 일상에 “바글거리는 물 비린내”(「휴일」)로 도래한다. 시집에서 물의 이미지는 뱀과 풀의 관계가 표현하듯이 뒤섞임을 나타내는데 이 뒤섞임은 밧줄처럼 얽혀서 분리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에게 갇힌 나의 얼굴을 찾기 위해 끊어진 밧줄마다 무늬를 그려놓고 끌었다가 놀았다가 합니다.” (「뱀」) 당신과 나가 밧줄처럼 얽히고 그래서 만들어지는 삶의 무늬가 바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세 번째 시집에 나타나고 있는 두 계열의 얽힘은 첫 번째 시집 『비금속 소년』과 두 번째 시집 『홍콩 정원』에서 추구해 온 시인의 세계가 산책길의 풍경 속에 고스란히 포개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식물의 이미지가 삶의 견인주의로 이어지고 있다면, 물의 이미지는 사물을 포함한 타자들의 목소리가 훼손되지 않고 그 존재를 알려오는 융합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시인은 “나는 길가에 떨어진 나뭇잎을/ 돌돌 말아봅니다/ 당신의 소리/ 나지막이 내보는 새가 있습니다.”(「겨울비」)라는 구절에 나타나고 있듯이 자기 내면에서 타자를 향한 내적 지향을 발견한다. 그것은 당신과 새 그리고 나뭇잎을 말아서 소리를 내는 시적 화자가 마침내 융합되는 순간이다. 나는 새인가, 아니면 새가 나인가? 이러한 구분이 사라지고, 사랑의 전류실험은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빗소리처럼 자기 존재를 알려오는 타자에게 귀를 열어두는 개방성에 도달함으로써 완료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우신의 시 세계는 비인간 객체의 사유를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비인간의 관점으로 배제할 수 없는 인간적 관점이 그의 시 내부에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비인간과 인간의 경계를 동시에 사유할 때 그의 세 번째 시집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에서 식물의 이미지와 물의 이미지를 활용해 삶의 견인주의와 타자 지향적 개방성을 포개어 놓는 시인의 시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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