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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Jun 26. 2024

윤의섭의 시 <기원(起源)>의 작법 분석

- 작법 분석 (1)


윤의섭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 비평가의 시선에서 그의 시 세계를 좋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서정시가 어떻게 자기 시의 패턴에 변화를 주며 독자에게 낯선 감각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보면 어떨까 싶다. 그러니까 비평적 관점이 아니라 순수한 창작론적 관점에서 윤의섭 선생의 시를 대상으로 분석해 보는 것이다. 나 자신의 문학 공부를 위한 방법이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 작품을 보는 안목을 길러보는 훈련이기도 하다. 좋은 비평가는 작품을 세심하게 뜯어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럼 훈련을 시작해보자.



起源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장대비는 더욱 거세졌다

이 거친 필법으로 잔산하던 저수지는 들끊는다

산비탈을 따라 비는 계속해서 덧칠을 한다

길이 지워지고 숲이 갇힌다

그제야 풍경은 홀연히 살아나는 것이었다

뭉개진 얼굴로 물의 칼을 등에 꽂은 채

아니면 빗물을 다 받아 마실 듯한 기세로

하늘과의 경계가 지워진 산등성이가 꿈틀거리고

여명보다 희미한 눈을 뜬 폭포가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푸른 어둠 속에서 낚시꾼들이 솟아나더니 흐느적거리며

빗속을 헤엄쳐 간다

저 魚族은 다음 비가 쏟아질 때에야 나타날 것이다

이정표에는 雲中路라고 씌어 있지만

더 이상의 표지는 없다

내게 비 내리기 전에 살았다는 흔적도 없다



윤의섭 시인의 '기원'이라는 시이다. 말 그대로 이 시는 서정시의 가장 기초적인 구조로 쓰인 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 패턴을 정리해보자.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장대비는 더욱 거세졌다

이 거친 필법으로 잔산하던 저수지는 들끊는다

산비탈을 따라 비는 계속해서 덧칠을 한다

길이 지워지고 숲이 갇힌다


여기까지의 부분이 바로 '상황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시의 전반부 4행은 이 시의 분위기, 감성, 그리고 뒤에 이어질 이미지들을 위한 장치이자 뒤에 이어질 시의 전개를 위한 기초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로 비유하면 사건이 전개될 배경 혹은 환경이라고 하겠다. 소설도 그렇지만 배경의 묘사만으로 소설이 완성될 수 없는 것처럼 시 또한 상황의 묘사만으로 시가 되지 않는다. 이 묘사를 의미화시키고 수렴시키는 문장이 필요하다. 일종의 뒤에 이어질 시의 전개를 위한 매개적 문장이 필요하다.

 

그제야 풍경은 홀연히 살아나는 것이었다


위의 문장이 바로 그 매개적 역할을 한다. 묘사만으로 밋밋해질 시상의 전개가 뻗어나갈 수 있도록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앞의 묘사가 덜렁 분리되어 붕뜨지 않도록 하고, 또한 뒤에 이어질 문장들의 자연스러운 연결고리 역할을 위해 이 문장은 이 시에서 반드시 구조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뒤에 구성될 이미지들이 앞의 묘사와 관계성을 맺지 않는다면, 앞의 상황묘사는 그냥 버려져도 좋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매개되는 문장을 전반부와 뒤에 이어지는 시상의 전개가 관련성을 맺어야 한다. 그럼 그 방법은 무엇일까? 난 이것을 '속성'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러니까 앞의 묘사 과정에서 제시된 상황과 연계될 수 있는 속성을 지닌 이미지가 활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뭉개진 얼굴로 물의 칼을 등에 꽂은 채

아니면 빗물을 다 받아 마실 듯한 기세로

하늘과의 경계가 지워진 산등성이가 꿈틀거리고

여명보다 희미한 눈을 뜬 폭포가 곳곳에서 피어오른다


자 위의 시행들을 살펴보자. 뭉개진 얼굴, 빗물을 다 마실듯한 기세, 경계가 지워진 산등성이 , 희미한 눈을 뜬 폭포로 비유되고 있는 시적 대상들을 살펴보자. 어떤가? 앞의 비가 내리고 운무가 끼어있는 산자락의 속성을 그대로 구체적인 사물의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비가 오면 산자락의 흙이 젖으며 발에 뭉개지는 장면을 연상할 수 있다. 즉, '상황묘사' 뒤에 이어지는 사물의 이미지들은 갑작스럽게 그냥 막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유유한 연상의 흐름과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제시된 상황묘사와 연결되는 이미지들의 배치만 있다면 이 시는 아마도 심심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많은 좋은 이미지들에도 불구하고 시의 완결성이 모자라거나 실패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푸른 어둠 속에서 낚시꾼들이 솟아나더니 흐느적거리며

빗속을 헤엄쳐 간다

저 魚族은 다음 비가 쏟아질 때에야 나타날 것이다


그럼 무엇이 더 있어야 하는 것일까? 바로 '근접성'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기원이라는 시는 푸른 어둠 속을 헤져가는 낚시꾼이라는 새로운 시적 대상을 도입했다. 하지만 그 낚시꾼이라는 대상의 모습이 산자락의 풍경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보기도 어렵다. 일상에서 충분히 마주하고 보았던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즉, 이 부분에서 고안해야 하는 장치는 새로운 시적 대상을 도입하되 그 대상이 앞의 시적 묘사들과 근접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극으로 비유하면 극적 긴장을 높이기 위해 새로운 등장인물을 등장시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이 등장인물이 외계어를 사용한다면 과연 극이 가능할까?


이정표에는 雲中路라고 씌어 있지만

더 이상의 표지는 없다

내게 비 내리기 전에 살았다는 흔적도 없다


그럼 남은 시행을 마저 살펴보자. 위의 시행은 특별한 비유 대신에 진술의 나열로 꾸려졌다. 오규원 선생이 이미 <현대시작법>에서 너무도 훌륭하게 설명한 것처럼 시는 크게 보면 진술과 묘사라는 두 요소를 어떻게 구조화하고 배치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 줄의 시행은 진술의 형태를 통해 시인이 담고자 하는 전언을 전달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조금 풀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운중로라는 말은 넓게 인생이란 미로일 것이고, 뜬구름 같은 존재인 자기 인식의 발견으로 귀결된다. 앞서 이야기한 이 시의 구조를 정리하면, 상황묘사 - 속성을 지닌 이미지 - 근접한 시적 대상의 도입 - 진술을 통한 자기 인식으로 귀결된다. 


이 시의 제목이 기원인 것처럼, 이 시는 서정의 전형적인 구조를 유려하고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윤의섭 시인의 시집 <마계> (2010)는 앞서 제시한 구조를 어떻게 비틀어 낯설게 할 것인가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구조적 패턴을 하씩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시 쓰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기회가 되면 같은 시집에 실린 다른 시들이 어떤 방식으로 앞의 구조를 비틀면서 낯설게 하기를 시도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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