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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Aug 20. 2024

자유는 죽음으로만 완성된다

이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 (2000)

  영화를 읽어가는 데에 어떤 법칙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안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을 다시 보면서 ‘자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랬기에 나는 펜대를 잡게 되었다. 작품에서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읽어내느냐는 그것을 보는 사람에 달린 것 같다. 영화는 스크린에 걸린 거울이고,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일 뿐이다. 이미지들의 흐름을 따라가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만날 뿐이다. 그 끝이 어디인지 나도 알 수 없다.


  2002년이면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이고, 이 작품이 말하고 싶었던 진의(眞意)에 다가가지 못했었다. 하긴 텍스트에 진의라는 것이 있을까? 다만 내가 그렇게 믿고 싶은 환상이겠지만. 그때 이 영화를 보고 감탄했던 것은 화려한 영상미와 액션 장면이었다. 소용을 연기한 장쯔이와 수련을 연기한 양자경의 대결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당시 이 영화를 보며 소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평범한 여인으로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면 부잣집 아녀자로서 어떤 고통도 없이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니 제멋대로 보이는 소용의 모습은 우리의 진짜 얼굴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소용과 우리의 차이가 있다면, 소용은 그녀의 욕망을 발산하며 드러냈고, 우리는 그것을 억누르며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점뿐이다. 


  문제의 시발은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평범한 아녀자의 삶을 거부한다는 점에 있다. 대신 그녀가 꿈꾸는 것은 강호에 나아가 명성을 얻고 강호의 고수로 인정받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욕망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있고,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용에게 사회가 강요하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야 하는 삶이다. 영화의 배경이 청나라 시대이니 당시의 가치관에서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소용의 개인적 자아는 사회적 자아로 성장할 기회를 빼앗긴 셈이다. 


  그녀가 가진 장점은 무엇인가? 바로 강호의 고수이자 암살자인 파란여우를 사부로 두고 무공을 익혔다는 점이다. 그래서 소용이 선택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결혼이라는 제도적 압력을 거부하고, 강호로 출도해 무림 고수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도구가 바로 무당의 청명보검이다. 그녀가 청명보검에 집착하는 것은 무림 최강의 검이기 때문이 아니다. 청명보검은 그녀의 위태한 자아를 지탱하는 팔루스이며, 소용이 꿈꾸던 자신이 쟁취하여야 할 꿈과 욕망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그것을 쥐고 있는 한 그녀는 강호의 고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마주한 현실은 냉혹하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강호란 무엇인가? 그녀가 꿈꾸는 강호는 의협이 살아있는 자유로운 희로애락의 공간이지만, 막상 강호는 도의(道義)가 떨어진 기존 세상의 연장과 다름없다. 더구나 청명보검을 노리는 탐욕스러운 자들을 아무리 물리친다고 해도 그녀는 강호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소용이 ‘청명보검’을 지니고 있어서 자신들이 졌다고 외칠 뿐이다. 즉, 소용의 강호행은 역설적으로 강호란 그녀가 꿈꾸던 유토피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집을 뛰쳐나오며 가족을 버렸고, 결혼 제도를 거부하였으며, 강호가 현실의 연장임을 알게 되면서 꿈꾸던 이상마저 빼앗긴 소용에게 남은 것은 사부 파란여우 뿐이다. 그런데 그녀마저 사실 소용의 재능을 질투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소용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 모두가 파괴당한다.이렇게 영화는 소용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하나씩 자신에게 주어진 억압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과정으로 시작하지만 그래서 도달한 곳이 알고 보니 제자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거부하고 방황해왔던 것일까? 


  그녀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욕망은 바로 자유이다. 그녀를 옥죄던 삶의 압력은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그녀를 짓누르는 것이다. 드디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무당산으로 입산한 소용이 연인에게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 “간절히 원하면 얻게 된다.”라는 말인데, 이 말을 끝으로 소용은 무당산 절벽 아래로 투신하며 영화는 끝난다. 그런데 소용의 말에는 자유와 현실 사이의 이율배반이 잘 드러난다. 소용은 자유를 간절히 욕망했지만, 현실의 삶에서 얻을 수 없었고, 그녀가 그렇게 갈망한 자유를 얻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헤겔이 말했듯 자유와 현실은 이율배반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 현실은 언제나 자유의 발목을 끌어내리고, 우리는 현실에 끌어내려질수록 자유를 갈망한다. 두 힘의 운동 사이에 인간은 존재하고 그 사이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리고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는 방법은 바로 죽음이다. 인생의 완성은 죽음을 통해 가능하고, 완성되는 순간 드디어 인간은 현실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화 <와호장룡>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유는 죽음으로만 완성된다는 진실이 아니었을까? 아마 이안 감독도 알았을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때는 오로지 죽음에 이르렀을 때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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