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훈 감독의 영화 <전력질주> (2025)
삶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멈춰 서서 묻게 된다. “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평범한 질문은 때로 두려움을 불러온다. 내 삶이 무의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우리를 잠식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거대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착각일지 모른다. 이때 우리는 마르셸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차에 적셔 먹는 쿠키 하나가 잊고 있던 고향과 첫사랑을 불현듯 불러내는 순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짧은 경험으로 우리는 다시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고, 자신만의 존재 의미를 얻을 수도 있다. 인생에 어떤 정답이나 거대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는 사고방식이야말로 우리 삶을 오류로 이끌어가는 큰 착각일 것이다.
이승훈 감독의 영화 <전력질주>는 이러한 삶의 비밀을 인상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간단히 말해 달리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장치들은 내러티브를 이끌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오히려 작품의 핵심에는 각자의 이유로 우리는 자기만의 속도로 삶이란 트랙을 전력 질주 중이라는 성찰이 녹아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것처럼 누군가에게 달리기는 대학 입학을 위한 수단이며, 꿈과 우정을 나누는 매개이고, 사랑의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저마다의 사정으로 삶이라는 트랙 위를 달리고 있으며, 동시에 삶이란 각자의 고통을 마주하는 장소이다.
영화는 장르적으로 스포츠 성장물이자 청춘 멜로물이다. 보통 이런 장르의 영화들은 약점을 지닌 주인공이 스포츠를 통해 자신의 벽을 마주하고 극복한다는 클리셰를 벗어나지 못한다. 작품의 주인공이 타인에게 감춰두었던 약점을 인정하고 수용한다는 서사는 대중들의 보편적인 정서를 자극하기 쉽고, 이는 스포츠 장르물의 한계이자 문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같은 스포츠 장르 영화는 “클리셰적 문법을 벗어나는 창의성을 어떻게 마련하고 있는가?”라는 것이 작품의 완성도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이 작품은 기성 스포츠물이 지닌 감정적 과잉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인물의 삶을 의도적으로 교차시키는 편집 방식을 택한다. 영화는 우연히 운동장을 달리고 있는 소녀에게 사랑을 느낀 후 무작정 런닝부에 가입한 강승열과 서서히 런닝 선수로서 정점을 찍은 뒤 서서히 기량 하락을 겪는 강구영의 삶을 대비시킨다. 두 인물은 각각 시작과 끝, 희망과 좌절을 상징한다. 강승열의 삶이 서서히 상승하는 사랑과 희망의 상승곡선을 그린다면, 강구영의 삶은 고난과 좌절의 하강 곡선을 그린다.
이 같은 대비적 구성은 기성 스포츠 성장물이 지닌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어, 관객으로 하여금 각 캐릭터에 대한 감정적 동일시를 정지시키고, 그들의 삶을 객관적인 것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만약 신처럼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 삶은 마냥 행복과 불행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고 반복되며 하나의 시간 안에 포개질 것이다. 즉,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각자의 보폭과 방법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승훈 감독의 <전력질주>가 특별한 이유는 자극적인 소재와 설정으로 일관하는 요즘 영화계의 흐름과 달리 이야기 자체의 매력과 편집 그리고 구조적 반전만으로 승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태도는 작품의 세계관과 완성도에 신뢰를 더한다. 이 영화는 삶이 무의미해 보이는 순간에도, 우리는 단지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 이 글은 <롤링스톤코리아>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