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아들

-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 (2025)

by 심우일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의 영화들은 서로 다른 존재자들의 차이와 그들 사이의 이해라는 문제에 천착해 왔고, 이번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원작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우선 영화의 미학적 측면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의 외형적인 변화에 있어서 기형성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또한 인물들의 움직임과 배치가 만들어내는 조형적인 이미지들이 아름답게 나타나고, 옷감에 있어서 붉은 원색의 활용,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 빛과 어둠을 활용한 공간 분할로 정적이지만 강렬한 미장센을 보여주고 있다.


익히 알려있듯이 영화 <프랑켄슈타인>은 SF 장르 소설의 기원적인 작품으로 메리 셸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철학적 깊이가 제거된 공포 영화이거나, 아니면 피조물이 탄생하는 과정을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과학적 열망과 오만에서 찾았다. 예컨대 제임스 웨일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1931)은 소설 원작의 작품 세계를 따른다기보다, 선악을 모르는 피조물로 인해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다룬 공포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원작에 가장 가깝다는 평을 받는 1995년작 <프랑켄슈타인>의 경우 사랑하는 가족과 부유한 가정 환경 그리고 상류층의 삶을 살아가는 빅터가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자 하는 과학적인 열망과 비극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전작들과 결이 다르다. 이번 작품은 북극해에 머물던 선원들에 의해 고립되어 죽을 위기에 처한 빅터가 구출된 후, 해군 선장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고백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창조주의 자기 회개로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빅터의 생명 창조 행위가 아버지에 대한 그의 내적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밝히며 전개된다. 빅터는 출산 도중 사망한 어머니를 살리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죽음은 누구도 극복하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에 대한 반항심으로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 결과 매독에 걸린 무기상의 후원과 빅터의 집념에 찬 연구로 생명을 창조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지 못한다. 자신이 창조하고도 피조물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빅터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유년 시절 그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지 않았던 냉정한 아버지를 닮았다. 이 같은 영화적 설정은 이 작품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오만을 비판하기보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과 화해라는 관점에서 원작을 해석했음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앞서 언급한 1995년작 <프랑켄슈타인>의 경우 피조물은 흉측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인간들에게 분노한 나머지 살인을 저지르는 악한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피조물은 빅터에게 자신이 악한이더라도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권리가 있다고 호소하는데, 이러한 피조물의 호소는 역설적으로 그의 내면에 내재한 인간성을 느끼게 해준다. 이때 자신을 이해해 줄 존재를 창조해달라는 피조물의 요구를 거절한 빅터로 인해 그의 친구와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이 피조물에게 살해당한다. 광기에 휩싸인 빅터는 죽은 약혼녀 엘리자베스를 다시 살려내지만, 그녀는 괴물의 모습이 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한다. 자신이 만든 피조물로 인해 가장 소중한 것들을 모두 잃은 빅터는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북극으로 사라진 피조물을 뒤쫓는다.


반면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에서 피조물은 버려져 고통받는 희생양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상을 떠돌며 사람들의 차별에 고통받던 순수한 영혼이 결말부에 이르러 죽어가는 아버지를 찾아온 아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1부는 빅터의 이야기, 2부는 피조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마주 앉아 대화하는 변증법적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둘은 대화를 통해 상대의 고통을 이해하고 화해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복수의 비극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라는 점이 명료해진다.


이렇게 영화에서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죽기 직전 자신을 찾아온 피조물을 아들로 인정한 이후 죽음을 맞고, 피조물은 드디어 괴물이 아니라 처음으로 빅터의 아들로서 즉, 사람으로 인정받게 된다. 피조물은 세상 바깥으로 사라지며 북극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이 장면은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용서이자, 자기 존재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삶의 희망을 상징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하여 마음은 부서질지라도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


- 롤링스톤코리아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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