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2025)
“어쩔 수가 없다.” 이 문장은 변명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세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태도이기도 하다. 박찬욱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앞의 문장을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특정 세대가 세계를 합리화하는 논법으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이 영화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자본주의 말기 중년 남성 위기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냉정한 초상처럼 보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가부장적 자기합리화의 기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반응은 모두 정당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유만수가 지키고자 하는 세계는 현재 상당수의 20–30대에게 삶의 표준이 아닌 세계이다.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지고, 어머니는 가정을 유지하며, 자식은 공부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는 삶의 이상화된 모델은 현재 유효하지 않은 모습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영화는 이 질서를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쉽게 붕괴하는 환상인지를 집요하게 노출한다. 유만수가 매달리는 평범함은 현실이라기보다, 자본주의가 일상을 통치하며 제시한 이상적인 가족 모델에 가깝다. 문제는 주변만 살펴봐도 그 약속이 현실적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지금의 사회에서 가족은 더 이상 단일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일인 가구, 비혼, 무자녀, 맞벌이, 자영업의 불안정성은 이미 일상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유만수의 위기는 객관적 조건의 위기이기 이전 자신이 신봉해 왔던 세계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에 가깝다. 그렇기에 그가 재취업을 위해 보여주는 행동들과 무능력한 가장으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한 공포는 과잉처럼 보인다. 무너지는 것은 실제의 삶이 아니라, 그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삶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연출은 이 허상 성격을 영화의 초반부터 명확히 한다. 가족과 함께 장어를 굽는 장면에서 드리워지는 그림자와 아내에게 건네는 신발이라는 선물은 유만수가 지키고자 하는 부르주아 가정이 이미 균열 위에 놓여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이 가정이 애초부터 전통적 핵가족의 모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는 아들이 있는 싱글맘과 결혼해 지금의 가정을 일궜으면서도 스스로 이상적인 가족을 지키는 가장으로 위치시킨다. 이 과정이 보여주는 상상과 현실의 불일치는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긴장감을 형성한다.
영화에서 재취업을 위한 면접 장면에서 자신의 단점을 말하라는 면접관들의 질문에 유만수는 그들이 원하는 답변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결함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지금까지 이루어낸 자신의 빛나는 과거 성취를 나열하며, 여전히 자신이 쓸모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이 지점에서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바로 유만수에게 문제는 가족의 생계가 아니라 무너진 자기 존재 가치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살인은 존재 가치의 회복을 위한 극단적 수단이 된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살인 행위의 윤리적 정당성 여부가 아니라 그가 갈수록 자신의 살인을 완벽하게 합리화하는가에 있다.
그의 살인은 정의 실현도 생존 불가피성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사라진 세계를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고, 가장이 되고, 쓸모 있는 남자가 되기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동원한다. 이때 가족을 위해서라는 명분은 가장 강력한 내적 면죄부로 작동한다. 영화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살인을 정당화되는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스스로 믿어버리는 주체의 이중성이다.
끝으로 영화의 개봉 이후 밝혀진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는 원래 유만수의 아내인 미리가 몰래 아들에게 유만수를 그 사람으로 지칭하며 끝낼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유만수가 지키고자 했던 가족이란 애초에 그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이었음을 더욱 명료하게 보여준다.
-이 글은 <서울경제TV>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