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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Mar 25. 2018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까지

  어린 시절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 2> (1991)를 재미있게 본적이 있다. 미래의 인간 혁명군 지도자 ‘존’을 살해하기 위해 스카이넷에 의해 과거로 보내진 터미네이터와 반대로 인간의 편에서 존을 지키기 위해 보내진 터미네이터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면 존의 미래를 위해 용광로 속에 자기 자신을 던져 희생하는 터미네이터의 모습이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이때의 터미네이터는 기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존의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존과 터미네이터가 감정적으로 교감할수록 터미네이터가 위험한 기계라는 사실은 망각되고 기억의 무의식에는 존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상징적 아버지가 자리 잡는다. 인간을 죽이면 안 된다는 존의 명령을 위기의 순간까지 어기지 않고 수행하는 기계 전사의 모습은 얼마나 윤리적인가. 

  우리는 누구나 밤마다 꿈속에서 불가능한 사랑 혹은 살인을 꿈꾼다. 그래서 기계적인 정확함으로 인간보다 더 윤리적인 모습을 갖춘 로봇을 보고 있자면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얼마나 우리는 삶의 현장 속에서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하고 실현시켜나가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영화 <터미네이터 2>가 존의 성장담이자 상징적인 아버지 찾기를 다루고 있다면,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의 <바이센테니얼맨> (2000)의 경우는 인공지능이 일상화된 미래 사회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근거를 찾아나서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앤드류 마틴이라는 이름을 가진 로봇이다. 마틴은 기술의 진보로 인해 인간과 외양이 같아지고 사랑하는 연인까지 생긴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과 달리 죽음이라는 사태에 직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앤드류 마틴은 인간이 되기 위해 영원한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이 작품의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동화 <피노키오>에서는 나무인형 피노키오가 요정의 마법에 의해 진짜 인간 소년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만,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은 인간의 존재성을 죽음이라는 근본적 사태에 근거하여 이해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이 지닌 숭고미를 드러낸다. 즉 피노키오는 일종의 신화적인 변신을 통해 문제 상황을 해결하고 있다면, 영화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죽음에 대한 선구라는 태도 속에서 찾는다. 그런데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의 경우처럼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죽음을 택한 로봇이 있다면 그는 과연 인간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럴 경우 진정 죽음이라는 사태가 인간과 로봇의 존재를 구분시켜주는 근거가 될 수 있는지 되묻게 된다.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전설적인 일본의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 (1979)에서 철이는 기계인간의 사냥에 의해 엄마를 잃고 우연히 자신을 도와준 메텔과 함께 우주여행을 떠난다. 엄마의 죽음이라는 사태에 직면하고 철이는 기계인간이 되어 영원한 삶과 행복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실제 기회가 왔을 때 스스로 기계인간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열차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떠나간다. 

  이 과정에서 철이는 각종 행성을 정류하며 기계인간이 된 사람들의 모습이 대면한다. 기계인간이 되어 행복할 줄 알았던 사람들은 다시 인간이 되기를 꿈꾸지만 결국 실패하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 과연 스스로 기계의 몸을 선택하고 죽음이라는 사태를 회피한 애니메이션 속의 인물들을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인간이 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로봇과 영원한 삶을 위해 로봇이 되기로 선택한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죽음이란 사태가 유효한지 의심이 된다.  


  이처럼 영화는 인간과 로봇의 관계에 대한 나름의 대답들을 내놓고 있다. 과연 인간과 로봇은 영화 속의 존과 터미네이터처럼 서로가 교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과 로봇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적 차원에 놓인 것일까?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기 전에 인간과 로봇이 공존적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른다. 

  3차 산업혁명의 성과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조직화라고 간략히 말할 수 있다. 도로를 만들고 기계를 이용해서 공간을 단축하는 작업으로 요약된다. 반면 4차 산업혁명은 일차적인 기계적 자동화를 넘어서 보다 복합적인 네트워크에 의해 시간과 공간을 관리하는 인공지능의 시대이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을 앞에 두고 있는 현대의 영화들은 인간과 로봇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언젠가부터 로봇하면 떠오르는 영화 시리즈가 있다. 바로 영화 <트랜스포머> (2007) 와 <퍼시픽 림 : 업라이징> (2018) 시리즈이다. 

  두 영화 모두 로봇이 등장하지만 두 시리즈에는 큰 차이가 있다. 영화 <트랜스포머>에서 로봇은 인간과 애초에 다른 외계종이다. 우주적인 생명의 분화된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인간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만의 개성과 의지를 지닌 생명체인 것이다. <트랜스포머>의 세계관에서 오히려 인간의 문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로봇의 모습을 하고 있는 외계종의 기술력과 문명을 허락 없이 복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기계 문명을 발전시키고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처럼 로봇의 형상을 취하고 있는 신들로부터 그들의 문명을 훔친 것이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트랜스포머>는 로봇이라는 새로운 종의 출현에 반응하는 인간의 시선에 관심을 가진다.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환대 사이에서 대립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외계종을 배제하느냐 아니면 수용하느냐의 문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반면 영화 <퍼시픽 림 : 업라이징>은 로봇을 인간 신체의 확장으로 바라본다. 이 작품에서 로봇은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담는 그릇에 더 가깝다. 이 작품에서 외계 생물체와 싸우는 예거라는 로봇은 두 조종사의 정신적 교감이 밀착될수록 그 능력을 발휘한다는 설정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영화가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유추할 수 있다. 인간과 로봇은 각각 분리된 개체가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의 확장이어야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양태 자체가 정신과 신체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예거라는 로봇은 인간의 존재적 특성이 극대화된 대상이다.  

  영화는 인공지능에 대한 불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 근거로 예거라는 로봇을 조종하는 파일럿이 윤리적 책임감을 지니고 있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인공지능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렇기에 잘못된 명령을 수행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에게 위기를 초래한다. 영화는 자신의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의 군수업체의 인공지능 드론 사업에 대해 예거 조종사들이 반대하는 장면을 삽입하고, 대조적으로 주인공 제이크의 아버지가 인류를 위해 영웅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장면을 환기시킨다. 

  영화 <퍼시픽 림 : 업라이징>은 로봇에 관한 영화이지만 알고 보면 인공지능을 넘어서 인간만이 지니고 있다고 생각되는 자기희생의 윤리와 인간애의 발현으로써 가족이라는 관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겉으로 보기에는 로봇에 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이며,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인류애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인 호소력을 가진다. 하지만 과연 인공지능과 다른 자기희생의 윤리는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것인가? 앞서 영화 <터미네이터 2>에서 인간을 위해 죽음을 택한 로봇을 떠올려보자. 굳이 자기를 희생하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자신의 임무를 모두 수행하고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터미네이터의 모습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대답하기 곤란하다.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와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다수의 의견들이 있을 뿐 어떤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인간과 로봇을 비교하기에 앞서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먼저 질문을 던지고 사유해봐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가 당위적이고 본질적이라고 믿고 있는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되어할 사유 이미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체적 경험을 초월한 우주적 생명 운동의 일부를 신체 이미지를 범주로 절취함으로써 세계와 나를 구분하고 주체라는 관념적 이미지를 인간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 말이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이제 본유 관념이 아니라 질문의 대상되어야 한다. 아니,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물음이 우리를 다른 삶의 영역으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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