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8.28
첫 대회는 경기도 평택에서 열린 전국 유소년 대회였다. 전국이라고 하기엔 근거리 지역의 축구클럽에서 온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많은 참가팀과 아이들, 같이 온 가족들로 제법 대회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른 아침부터 경기장 내 휘날리는 대회 현수막과 한쪽에 위치한 대회본부석의 번쩍이는 트로피들, 검은 유니폼을 입은 근엄한 심판진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긴장감 마저 들었다.
처음 본 광경에 들뜬 건 둘째도 마찬가지였다. 동그랗게 뜬 눈과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경기장을 둘러보더니 심장 언저리가 간지러운 듯 가슴 위에 양손을 얹어 포개어 놓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전율을 느낀 순간이리라.
각양각색의 유니폼을 입은 작고 발랄한 아이들은 서로를 견제하면서도 서로를 궁금해하는 듯했다. 경쟁상대라는 개념은 있었겠지만, 그저 오늘 하루 같이 공을 차고 놀 친구로 보는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잔뜩 느껴졌다.
대회는 조별예선을 거쳐 조 1,2위만 본선에 진출하는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됐다. 둘째를 포함하여 1학년은 두 명뿐이라 2학년 부로 합쳐서 출전하기로 했는데, 첫 경기 상대팀은 3학년이 합쳐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키와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당연히 첫 경기는 0대 6 완패였다.
대회 우승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효골 하나 없이 속수무책으로 골이 먹히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얻어맞는 것처럼 아프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이들의 대회인데도 그랬다. 마치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지고 있는 것처럼 쓰라리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둘째의 얼굴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간에라도 안 하겠다고 뛰쳐나오지는 않을까, 눈물이라도 훔치면서 뛰고 있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뛰쳐나오지도 울지도 않고, 땀에 젖은 얼굴로 안간힘을 쓰며 뛰어다니는 걸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첫 경기가 끝나고 땀에 젖은 둘째의 얼굴을 닦아주며 잘했어, 정말 열심히 하더라, 다독여주었다. 둘째는 지친 건지, 처참한 패배에 대한 설움 때문인지 내 말은 듣지 못한 채 얼빠진 표정이 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몇 골이나 먹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이들이 풀 죽은 모습을 보니 아, 이게 뭐라고, 덩달아 어깨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계속 뛰어야 하기 때문에 물로 목만 축일 정도의 짧은 휴식시간을 거치면서 총 세 경기를 더 치렀다. 결과는 전패.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경기를 치르면서 아이들의 실력이 느는 건지, 오기가 생기는 건지 실점이 점점 줄었다는 것이었다. 0대 6에서 0대 4, 0대 2 그리고 마지막 경기는 아쉽게도 0대 1. 물론 실점이 줄었다고 해서 이기거나 득점을 한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경기가 거듭될수록 응원하는 가족들의 가슴도 점점 뜨거워졌고, 아이들의 표정도 점점 살아나기 시작했다.
감독님의 첫 대회 참가 목표는 한 골이라도 넣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아이들의 생각은 달랐겠지만, 신설한 지 한 달 된 대표반의 목표로 한 골을 넣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경기가 지속되면서 수긍하게 되었다. 처음엔 초등학교 저학년들의 실력이 잘해봤자 얼마나 뛰어나겠나 싶었는데, 모든 축구팀과 모든 지역에 한 명씩 손흥민과 김민재가 있었다. 메시가 있었고, 음바페와 호날두, 네이마르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있었다. 저마다 눈빛을 반짝이며 그라운드를 누비는 아이들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통쾌하고 즐거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승자의 여유와 미소가 어른인 나도 부러워질 지경이었다.
나는 둘째가 이번 대회를 통해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끼길 바랐다. 대표반에서의 힘든 훈련과 감독님의 호령에 무서워서 그만두겠다고 했다가 첫 대회는 치러보고 싶다며 한 달을 버티고 노력하면서 결과가 어떻든 노력이 주는 결실과 스스로 하는 끝맺음을 직접 겪어 볼 수 있기를. 그래서 동전의 양면처럼 쉽게 뒤집을 수 있는 도전과 포기 사이 수많은 시도와 실패가 켜켜이 쌓여 결국 다른 형태의 무언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기를. 장장 5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패배를 겪었던 둘째는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오히려 홀가분한 표정으로 다가와 내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엄마, 배 고파.
가족 모두 점심까지 거르고 응원과 경기에 빠져있었다. 둘째의 말을 신호로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둘째를 데리고 근처 고깃집에서 갈비와 냉면을 실컷 먹였다. 아무도 경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배를 채우기 바빴다. 먼저 입을 연 건, 혼자 거의 갈비 2인분을 해치운 둘째였다.
"나 대표반 계속할 거야. 한 번은 이겨봐야겠어."
대회에 나가봤으니 더 이상 안 하겠다고 그만둔다는 말을 예상했었는데, 둘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밖이었다. 전패를 당한 아이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알 수 없는 갈망과 투지가 뒤섞인 표정이었다. 나는 그걸 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힘들어도 버티고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는데, 둘째는 이미 그 너머의 희망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첫 대회 참가를 목표로 했다가, 첫 승리를 바라게 되고, 첫 우승을 바라게 되거나 또 다른 꿈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시작점에서 힘차게 달려나갈 준비를. 무수히 넘어지고 쓰러지겠지만, 지금과 같은 표정과 눈빛이라면 분명 즐거운 여정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갈비를 어디로 먹었는지, 배보다 마음이 부르고 벅찬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때로 부모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고 위대한 것 같다. 아이라고 해서 생각의 깊이나 꿈의 크기가 결코 작지 않다는 걸 가끔 잊게 된다. 아이만의 세상에선 자신의 생각이 세상의 전부이고, 온전한 하나의 세계일 텐데 부모의 잣대로 크기를 측정하고, 중요도를 저울질하고, 자르고 다듬어 가지치기를 하려 든다. 어떤 계기를 통해 아이가 느끼고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는 지금도 나름의 속도로 배우고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속도와 크기로. 부모의 역할은 그날처럼 조용히 곁에서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는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할 수 없음을. 이번 대회를 통해 느끼고 성장한 건 둘째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