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덕에 공주 된 척추골절 아줌마
네 살 첫째가 얼마 전부터 갑자기 공주 이야기에 심취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공주 이야기를 들려달란다. 나는 척추가 부러진 후로 아이랑 바깥 외출도, 바닥 놀이도 전혀 못 해주는 것에 미안함이 크다. 누워서 입만 놀리면 되는 '동화 들려주기'는 내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육아 활동 중 하나다. 열과 성을 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다만 어린 아들은 갈등과 위험을 못 견딘다.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뺏길 때는 제발 이야기를 바꿔달라고 했다. 백설공주가 독사과를 먹는 장면에선 비명을 질렀고, 신데렐라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엔 오열을 멈추지 못했다. 에휴, 애 재우려고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달래는데 시간이 더 걸린다.
아무도 슬프지 않고 다치지 않는 아이의 세계관에서 상상력이 부족한 엄마는 동화를 꾸려갈 재간이 없다. 나는 독 없는 친환경 사과를 맛있게 먹는 백설공주 이야기, 양친이 살아있고 노동에서 자유로운 신데렐라 이야기를 억지로 지어내다가 한계에 부딪혔다. 인어공주도 마찬가지다. 다리를 얻는 대신 목소리를 빼앗길 수는 없으니 어쩐다... 대충 지어내기로 했다.
"인어공주는 말이야, 인어라서 다리 없고 꼬리가 있잖아. 사람이랑 달라서 육지에서 걸을 수가 없어. 음... 그래서 왕자님이 휠체어에 태워서 궁전에 데려갔대."
"... 휠체어?"
아이도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창작은 기세다! 나는 더 뻔뻔하게 밀어붙였다.
"응! 그래서 행복하게 결혼했대요~ 봐봐. 엄마도 지금 다쳐서 못 걷지만, 아빠랑 식구들이랑 잘 살고 있지? 뭐, 그런 거야."
캬. 찢었다. 이 정도면 네 살은 납득할 것이다. 아이는 눈을 반짝였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엄마가... 인어공주였어요!"
"호오. 엄마 공주야? 고마워~"
"엄마는, 공주님이야! 나는 왕자 할 거야. 그러면 우리 결혼하는 거예요."
아이의 천진함은 와병 환자를 순식간에 인어 공주로 만들어 주었다. 게다가 새 시집까지 보내 준단다. 척추 하나 빠개진 것도 나름 보람이 있구나. 내가 꽤나 감동을 받은 사이 첫째는 내 손을 쥐고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리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나는 아직 네 살인 아이에게 동화 속에 슬픈 장면이 등장해도 차분히 그다음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설득할 자신은 없다. 나도 내 인생의 슬픈 장면에서 엉엉 울었는걸. 둘째 낳자마자 큰 부상을 입은 것에 크게 낙심했었다. 밥도 먹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울기만 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주 소리를 들었다.
종일 성인 기저귀를 차야 했던 내가 기저귀도 떼었고, 조금씩이나마 보행기에 의지해서 걸음마도 한다. 아마 내년쯤이면 외출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둘째를 안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가 보면 언젠가 이 시기도 지나가고, 나는 걷고 달리며 나의 열매들을 키워나가겠지. 시간이 지나면 첫째도 백설공주가 독사과를 삼켜도,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빼앗겨도 울지 않게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