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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랑 미디어 없이 몸으로 시간 때우기

엄마 척추가 부러져도 놀이는 계속된다.

by 오지의

나는 네 살 아들과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외식과 나들이를 즐기던 사람이다. 엄마와 놀러 나간다는 것만으로도 한창 즐거울 나이기는 해도, 기다림의 시간은 아기에게 익숙하지 않다. 이럴 때 중간중간 여흥을 제공해야 하는 것도 나의 임무다. 특히 식당에서 밥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엄마들 공감하실 듯)


나는 때때로 아이에게 TV를 보여주지만, 밥과 관련해서는 틀어주지 않는다. 스티커북 같은 게 있다면 좋겠지만, 뚜벅이로 다닐 때도 많기에 짐을 바리바리 싸는 것은 번거롭다. 결국 내가 엔터테이너가 되지 않으면 우리 아이는 민망스럽게 다른 아이들의 아이패드와 유튜브 화면을 기웃거리게 된다.


그렇다면, 식당에서 미디어를 보지 않는 아이는 엄마랑 뭐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게 좋을까. 아기가 네 살이 되니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따로 물건을 챙기지 않아도 언제나 내 몸에 붙어 있는, 내 손을 제일 많이 쓴다. 다음은 미디어 free, 준비물 free를 표방하는 나의 소소한 놀이 팁이다.


1. 가위바위보

만 3세 정도 되면 가위바위보 규칙을 알려줄 수 있다. 규칙을 숙지하지 못해도 손으로 하는 놀이를 충분히 즐거워한다. 보는 보자기처럼, 가위는 가위질 시늉을 해본다. 가위바위보가 시시해진 어린이는 묵찌빠, 하나빼기를 하면 된다.


2. 어느 손가락이게

몰래 목뒷덜미 쿡 찌르고 어느 손가락이게~ 이런 단순한 놀이만 해줘도 서너 살까진 재밌어한다. 아이가 엄마한테 하는 것도 좋다. 알아맞히는 과정에서 적당한 완급 조절, 연기 곁들여주면 금상첨화. 히이이이익!!! 어떻게 한 번에 맞췄지?


3. 엄지 씨름

손 마주 잡고 엄지로 상대의 엄지를 누르면 승. 이 시합에선 우리 애는 상당히 집요해진다. 어쩐지 소근육도 기르고 집중력도 도움 될 것만 같다. 뭐,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렇게 손 놀이 세 판 하면 밥 기다리는 시간 정도는 간단히 해결 가능.


4. ***자로 시작하는 말

리리리자로 시작하는 말~ 말놀이를 통해 어휘력도 쑥쑥 자란다. 물론 어린아이니까 골똘히 생각해야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시간 끌기에 최적이란 뜻. 적당히 힌트를 주면서 놀아주면 시간 순삭! 아이가 더 자라고 우리말 실력이 늘면 끝말잇기도 가능.


5. 젓가락 포장지 접기

이건 식당 한정 남편의 필살기다. 젓가락의 종이 포장지를 이리저리 접어 본다. 대충 꼬꼬닭~ 미라~ 아무 모양이나 갖다 붙여도 신기하게 애들은 납득한다. 더 어린 아기였을 때는 포장지를 잘게 찢으며 놀았다. 종이접기를 좋아하는 아이라면 스스로 접기도 대유잼.


6. 다른 그림 찾기

이것도 식당 한정 필살기. 한식 식당 수저통에는 짝 안 맞는 젓가락 하나쯤 있는 것이 국룰. 젓가락 두 개를 쥐어 주고 '다른 그림 찾기 놀이'랍시고 분위기를 잡아주면 곧잘 집중한다.


7. 유희로부터의 파업

아기의 모든 순간을 유희, 혹은 유희를 빙자한 학습으로 채워야 할 이유가 없다. 나는 인간의 정신 세계에 외부로부터의 입력이 없는 시간도 중요하다고 믿는다. 높은 경지에 이르면 명상이고, 일상적으로는 멍 때리는 그런 시간 말이다. 무료하면 무료한 대로 그냥 있는 것도 유익하다. 아이가 스스로 흥미거리를 발견할 기회를 주자. 즉, 엄마가 항상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을 버리자.


뭐 이런 먼지 같은 일상을 팁이랍시고 글을 쓰는 것이 퍽 민망스럽다. 하지만 척추가 부러져 와병 환자가 되고 나니, 임기응변 원툴로도 아이랑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요령이 금과 같이 귀함을 깨달았다. 외출을 하거나 바닥 놀이를 할 수 없는 나는 지금도 누워서 대강 손과 말로 때우는 육아를 한다. (물론 아이가 잘 따르는 성향인 것도 한몫한다.)


바깥에서건 집에서건, 언제나 다 갖춰진 환경에서만 아이를 돌볼 수는 없다. 각종 미디어와 현란한 놀잇감에 무한히 의존만 할 수도 없다. 나는 화장실만 가까스로 스스로 해결하는 병든 엄마다. 그래도 아이들은 자라고, 육아에는 병가가 없다. 아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엄마를 가장 좋아한다는 자신감을 에너지 삼아야 버틸 수 있다. 아무리 부족해도, 시시해도 엄마와 직접 대면하는 놀이로 아이의 일상을 채워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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