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노키즈존으로 선포한다

딩크 VS 유자녀, 갈등 이면의 두려움

by 오지의

가족계획이 사적인 영역이긴 해도, 지인이 산부인과 의사라면 솔직해지게 마련인가 보다. 그래서 나는 표면적으로는 유사한 '딩크족'인 사람들이 내면에는 저마다 다른 복잡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린 사실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n년째 애가 안 생겨. 난임 시술은 영 부담스러운데, 정말로 그렇게 힘들어?' '들어봐, 내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HPV(인유두종바이러스, 주로 성접촉으로 감염)가 나왔다니까? 이거 남편놈 탓 맞지? 내가 이 인간 믿고 어떻게 애를 가져?' '지금 사업이 막 자리 잡는 중이라, 일 놓기가 힘드네. 3, 4년만 지나면 내가 혹시 애기 갖기 힘들어질까?' 단순히 현재 아기가 없는 부부라는 상황만 동일할 뿐, 딩크에 대한 적극성과 이유에 있어서는 넓은 회색 지대가 있다.


무자녀 기혼자의 비율이 늘어나다 보니, 이를 둘러싼 담론도 적지 않다. 가장 흔한 시나리오는 경제적 부담으로 불가피하게 딩크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SNS 알고리즘의 계시를 받아 집구석에서 애들 재우던 나에게까지 도달한 오늘의 주인공은 그런 허름한 청년 서사를 걸치지 않았다. 오히려 명품과 럭셔리 여행을 과시하며 과감한 도발을 시전 했다. "보다시피 우린 부유한 부부야. 하지만 아기를 낳지 않을 거야. 대신 더 큰 경제적 자유를 누릴 거야. 아이 없는 삶을 통해 우리의 완벽주의와 통제 성향을 충족할 수 있어. 이 결정은 나의 내면의 평화를 위해서야."

이 부부가 알고리즘 신의 간택을 받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시물에 대한 반응이 대단한 투기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쪽 진영에서 저쪽 진영으로, 댓글의 돌팔매질이 날아다녔다. 당신이라면 무엇이라고 반응하겠는가? 아니, 애당초 꼭 댓글을 남겨야만 할까? '정답'은 정해져 있다. 그들의 선택, 그들의 삶 아닌가. 당연히 누구도 함부로 폄훼하거나 끼어들 수 없다. 다만 이 선언이 공개적이었고, SNS를 타고 너무 많은 이들에게 도달해 버렸다. 그러니 튀는 반응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흥, 나중에 후회할 걸. 노후는 어쩔 건데?'
'후회라니? 애 땜에 지지고 볶고 고생하느니 저렇게 사는 게 훨씬 낫다.'
'솔직히 미성숙하게 보임...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이 애 대신 키워줄 건가? 애엄마 중에 이기적인 사람이 더 많더라.'

앞서 살펴본 육아 담론처럼, 딩크 선언도 감정이 과열되는 전형적인 불타는 고구마 중 하나다. (여기서 구별할 것은 딩크로 살아가는 삶 자체는 별다른 감정적 논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딩크의 장점을 통해 정당성을 피력하는 선언만이 가치 판단의 불쏘시개가 된다. ) 어떤 이들은 딩크 선언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굳이 자신과 무관한 이들의 삶에 끼어들어 말을 얹을 정도로. 또 다른 이들은 그 못마땅해하는 이들을 못마땅해한다. 맞다. 누구나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는 생각은 구시대적이고, 강압적이며, 다양성을 침범한다. 엣헴, 나도 이 사회의 번듯한 어른 노릇을 해야 하므로, 내 주변의 딩크족에게 무례한 사생활 질문을 하지 않고(나는 보통 질문을 받는 쪽이다), 그들의 선택을 온전히 존중하며, 감히 아기를 낳으라고 설득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말이다...

나도 그 부부의 딩크 선언이 마뜩잖은 면이 있다.


일단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 부부의 부유함이 부러워서 질투가 나는 것은 아니다. 나도 괜찮게 먹고 산다. 아직까지 아이들 낳은 것을 후회한 적도 없다. 그렇다면 유자녀 삶이 기절초풍하게 황홀해서 남에게도 강권하고 싶은 건인가 하니, 딱히 그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나의 경제적 안정과, 통제 가능한 삶의 방식을 아이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곱씹어보자면, 혓바닥 어딘가가 까끌한 구석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아아! 어째서 '배울 만치 배운 문명 시민'인 나에게 이런 못난 마음이 드는 것일까. 나의 내면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가장 깊숙한 곳에서 뭔가를 끄집어 올렸다. 두려움이었다.


맞다. 나는 사실 무서운 것이었다. 미래의 연기금 고갈을 염려하는 것도, 딩크족을 질투하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들의 행복을 걱정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선명한 이유와 논리를 펼치며 자녀를 거부한다. 이런 '적극적 딩크족'은 비용이 걱정되어서 아이를 낳기 어렵다든가, 바쁘게 살다 보니 어쩌다 아이 없는 삶이 굳어졌다는 입장과 차이가 있다. 그들의 이유는 타당하며, 논리는 완벽해서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나는 그런 빈틈없는 선언이 가장 두렵다. 이는 아이로 표상되는 불확실성에 대한 거절이며, 인생 전체를 노키즈존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자기 사업장을 노키즈존으로 운영하겠다는 자영업자에게 핀잔을 줄 권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노키즈존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것이 딱히 반가울 부모도 없다. 사회의 노키즈존이 물리적 장소라면, 적극적 딩크 선언은 무형의 가치관이다. 개인에게는 제아무리 합리적인 결정일 지라도, 그 선택이 켜켜이 모여서 만들어갈 세계의 윤곽이 두렵다. 효율과 성과를 극단적으로 중시하는 우리 사회는 이미 소란스럽고 품이 많이 드는 어린이들에게 비우호적이다. 그나마 지금까지 아이들이 용인된 것은, 누구나 아이 하나쯤 키운다는 암묵적인 보편성 덕분이었다. 취약자와 직간접적인 돌봄 관계에 있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비효율과 예측 불능을 감수한다. 하지만 그 관계 자체를 원천적으로 거부한 사람들이 보다 많아질수록, 참을 이유도 사라진다.


결국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딩크족이 아니다. 불확실성과 수고로움을 삶에서 지워내는 것이 세련되고 합리적인 선택으로 통용되는 분위기다. 그런 사회는 아이들에게만 좁아지지 않는다. 느리고, 아프고, 예측 불가능한 모든 존재들에게 함께 좁아진다. 돌봄이 사랑 대신 비용으로, 관계 대신 리스크로 계산되기 시작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출산율 그래프의 몇 퍼센트가 아니다.


그 부부에게는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완벽히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다. 나는 그 선택을 온전히 존중하는 것이 이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이 씁쓸한 뒷맛은 무엇일까. 나는 잠든 아이들을 바라본다. 첫 애는 하원길에 생떼를 써서 나를 진 빠지게 만들었고, 둘째는 요즘 이앓이 때문에 악악 울어재낀다. 나는 애 둘을 돌보느라 돈을 못 벌고 있으며, 품은 뭐 말도 못 하게 든다. 나의 바람은 내 삶의 '수고스럽고 비효율적인'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 아니다. 대신 나의 아이들이 살아갈 세계가 그들을 조금이나마 환대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이 설 수 있는 땅이 지금보다 좁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려면 딩크 선언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돌봄과 불확실성이 다시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까. 애 둘을 겨우 재워놓고 드리운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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