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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할 정도로 충격적인 노산의 진실.jpg

...이라는 제목의 글의 진실.txt

by 오지의

아마 인터넷 커뮤니티를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은 바로 이 자극적인 제목의 노산 관련 게시물을 한 번쯤 봤을 것이다. 어느 커뮤니티에서든 조회수와 댓글, 거기에 파생하는 논쟁이 대폭발 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게시물의 일부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 의견 아님 주의)


- 20대 때 아기를 낳아야 난자가 활성화되어 50대에도 똑똑하고 예쁘고 건강한 아기를 낳는다.
- 노산 때문에 근종과 자궁 내막증이 생기며, 이것이 태아 문제를 만든다.
- 40세 노산모의 다운증후군 출산 확률은 무려 10%에 이른다.


물론 여성의 나이가 많을수록 임신 성공률이 감소하며, 노산모의 산후 회복이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리고, 제왕절개 비율이 높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도 섞여 있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아예 엉터리이거나, 자료가 지나치게 오래되어서 현시점에서 무의미할 정도이다. 이른 출산으로 난자가 50대까지 활성화된다는 근거 없는 주장에선 말문이 턱 막힌다. 노산이 근종과 자궁 내막증을 유발한다는 것도 엄연히 틀린 말이며, 40세 노산모의 다운증후군 출산 확률은 10%가 아닌 약 1%이다. (이는 20대 산모보다 확연히 높은 확률이지만, 여전히 다운증후군이 아닐 확률이 99%이다.) 자료의 본문에 '유무막 검사'같은 어처구니없는 맞춤법 오류가 있다는 것은 차라리 사소한 문제라서 지적할 가치조차 없다.


이 캡처를 보면 생각이 나실지도...?


먼저 한 가지 전제를 깔아야 할 것은, 노산은 분명한 생물학적 현상이며 그에 수반되는 의학적 위험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는 반복된 연구로 충분히 검증되었고, 산부인과 의사인 내가 진료실에서 산모들에게 수도 없이 설명해 온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저 게시물은 헛웃음이 날 만큼 억지가 많다. 게다가 같은 내용이 이미 과거에도 주기적으로 여러 인터넷 공간에 업로드되면서 댓글 만선을 기록한 적이 있다. 이 구닥다리 게시물이 좀비처럼 살아남아 불필요한 갈등을 조장하는 것을 보며 현기증이 났다. 물론 불붙은 논란에 곧 삭제되기는 했다. (그래서 링크를 첨부하지 못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길...) 그래도 멀지 않은 시일에 (커뮤 중독자인) 내 눈에 또 들어올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다시금 비생산적인 논쟁을 유발할 것이 뻔했다.


(비장함) 이제는 누군가가 반박을 해야 될 시간이다.


때마침 노산모인 나는 입덧 스트레스가 절정에 이르던 시점이었다. 어딘가에 분풀이(?)를 하고 싶던 차에 이렇게 허점 투성이인 만만한 상대가 나타나니 오히려 좋아... ^^ 희열을 느낄 지경이었다. 문장 단위로 조목조목 패 줄 반박 자료를 준비하던 차에, 혼자서 중도에 맥이 풀려서 그만두었다. 행간의 악의를 곱씹다가 깨달은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데이터를 동원하여 논리적으로 반박할 부분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이 기조의 게시물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산부인과 전문의가 문헌을 들이대며 주장해도 귀 기울이지도, 이해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노산이란 함께 현실을 고민하고 위험을 관리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가 아니다. 그저 '혐오 스포츠'의 한 종목에 불과하다. 그래서 내가 공들여 '잔인할 정도로 충격적인 노산의 진실.jpg'를 기각한다고 해도 다른 동류의 주장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노산모를 위축시키고, 열등한 상태로 격하시키고 싶어서 안달 난 이들의 의도가 훨씬 잔인하고 충격적인데도 말이다.


아, 이쯤 되면 내 글에 대한 반응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의사가 되어가지고 노산이 해롭다는 과학도 인정 못하냐?ㅋㅋㅋ"
"그러게 왜 굳이 늙어서 애 낳냐. 막상 지도 노산모 되어보니 긁히나 보네"
"노산이 얼마나 나쁜지 알려야 사람들이 애를 일찍 낳고 저출산 극복이 될 거 아님? 생각이 없네ㅉㅉ"


반박은 차라리 여기서부터 시작해 보자. 일단 마법의 단어, '과학'. 이 전능해 보이는 단어는 어느 새부턴가 우기기에 상습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했다. (ex. 관상은 과학) 그런데 가끔 과학의 권위만 빌려오고 싶고, 과학의 본질은 모른 척하는 이들이 있다. 과학이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지언정, 최대한의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분야다. 그래서 왜곡이란 모름지기 과학 세계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추락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참을 거짓으로, 거짓을 참으로 뒤집는 것만이 왜곡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학은 위험과 이득의 크기 측량이 중요한 분야다. 그래야 득실을 더하고 빼서 현명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다. 10만큼의 위험은 10으로, 10만큼의 이득은 10으로 표현해야 한다. 10을 1로 축소하거나, 100으로 확대하는 것도 왜곡이다. 10이건 1이건 100이건, 어차피 위험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설령 진실의 조각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들, 정도를 입맛대로 반죽해선 안된다.


악의적 왜곡은 객관적 분석과 달리, 위험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량하여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감정적 공포를 퍼트리는 것이 목적이다. 위험의 어느 한 측면만을 과장하기 시작하면 끝없이 누군가를 공포에 빠트릴 수 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다. 여성이 일생동안 한 번도 출산하지 않는 것은 자궁내막암, 난소암과 유방암의 위험을 상승시킨다. 이 파편적 사실에 유해한 조미료를 잔뜩 뿌린다면, 누구나 새로운 혐오 장르를 뚝딱 탄생시킬 수 있다. '잔인할 정도로 끔찍한 비출산의 현실.txt'. 이런 목록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심지어 조회수 폭발도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반면 진짜 과학을 장착한 전문가는 출산, 비만 같은 민감한 주제, 때때로 술/담배 같은 기호식품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참견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노산모건, 흡연자이건, 비만인이건 그들의 건강과 이익을 증진한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산부인과 의사이기 때문에 노산이라는 실질적 위험에 대항하여 노력하고, 나에게 진료받는 이들과 궁극적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하지만 혐오 콘텐츠는 약점을 가진 집단에 아무런 동조 없이 타자화할 뿐이다. 노산이 그렇게나 걱정된다면, 그들이야말로 왜 노산모와 태아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가? 나는 노산을 조롱거리로 삼는 사람이 산부인과 인프라 확대와 신생아의학의 증진을 주장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노산모가 안전하게 출산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인데도 말이다.


혐오 장르의 팬들은 어떤 주제가 사람들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지 잘도 찾아낸다. 노산이 논쟁적 타깃이 되는 이유는 인간의 근원적 감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노산은 태아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노산을 조롱하는 이들은, 너무나도 손쉽게 자녀를 인질로 삼는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노산을 감수하는 사람들은 욕심 때문에 자식에게 잠재적 위해를 가하는 천하의 몹쓸 놈들이다. 겉으로는 노산을 걱정하는 척 하지만, 사실 행간에선 노산 집단의 인격을 공격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학적 근거에 기초할지라도 태아의 건강 상담은 - 특히 부정적일 때 - 무척 조심스럽게 마련이다. 하물며 근거도 저질인 데다가 비하적 자세로 자식을 건드리면 많은 이들이 발끈하게 마련이다. 혐오 팬들은 여기에 또 환호한다. 감정적인 주제에 감정적인 반응이 뒤따르는 것을 조롱거리로 삼으면 된다. ("긁?")


과장과 호들갑이 심할지언정, 이 겁주기 전략이 적어도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는 있지 않을까? 아직 20대인 이들이 노산의 위험에 겁을 잔뜩 집어먹은 나머지 헐레벌떡 결혼하고 애를 낳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거야말로 실소가 나오는 이야기이다. 노산 공포를 조장하는 것과, 만혼/노산의 경향성은 사실 논리의 구조가 일치한다. 자녀에게는 아주 작은 약점이라도 물려줘선 안 되고, 자녀와 관련된 불확실성을 감수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라는 무정한 세계관이다. 우리 사회의 상당수가 바로 그렇게 인식하기 시작해서 한국의 청년 세대는 결혼도 갖춰진 후에, 출산도 갖춰진 후에만 한다. 충분히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아예 시도하지 않는다. 최적의 시기에, 최고의 자원을 모두 확보한 사람만 선별적으로 2세를 출산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대체 누군들 마음 편히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이제 슬슬 정리를 하자. 노산은 분명히 어느 정도 위험하다. 그리고 그 위험의 크기는 당연히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 노산모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도를 추산할 수 있는 정확한 정보와, 되도록이면 위험을 최소화하는 정교한 관리이다. 당연히 걱정스럽겠지만, 나에게 위험한 만큼만 걱정하면 충분하다. (예를 들어 나는 현재 노산모인데, 태아가 기형아일까 봐 벌벌 떨지 않는다. 기형아를 출산할 확률보다 내가 체력적으로 육아 부담을 느낄 확률이 훨씬 높으며, 따라서 더 타당한 걱정이다.) 애초에 애 낳고 키우는 일은 인간의 공포 심리를 민감하게 건드리는 대형 과제다. 나 몰라라 천하태평해서야 안 되겠지만, 불필요하게 과민할 필요도 없다.


뭐, 이런 뻔하고 지루한 이야기는 조회수를 폭발시키지도, 연이은 댓글과 화끈한 논쟁을 불러오지도 않을 것이다. 콘텐츠를 쏠쏠하게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과장하는 것이다. 더 극단적으로 굴수록, 활시위는 팽팽해진다. 그리고 만만한 특정 집단에게 겨냥한 후에, 가장 근원적 감정을 건드릴 만한 약점을 노려 때리면 된다. 혐오주의자들은 노산이 시시해지면 또 다른 소재를 가지고 와서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짓밟을 것이다. 가난한 주제에 애를 낳아? 뚱뚱한 주제에 연애를 꿈꿔? 일말의 약점이라도 보이면 머리채를 쥐고 조리돌림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은 늘 새로운 먹잇감을 노린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조롱과 혐오는 그 누구도 지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고립시킬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감히 제안하건대, 혐오 장르의 플레이어가 되지 않기를, 그 경기장 안에 발 들이지 않기를 권한다. 생산은 물론 소비를 포함해서 말이다. 내가 처음에 마음먹었던 것처럼 일일이 사실 검증을 해보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마음먹고 극단적으로 왜곡하는 상대에게는 큰 영향이 없다. 논쟁을 더 크게 만들어준다고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른다. '나 아는 사람은 40에도 건강한 아기 잘만 낳던걸?'라는 식의 일화적 보고도 반박으로서 별 의미는 없다. 가장 좋은 것은 유해한 콘텐츠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분노에 겨워 댓글을 달지도 않고, 낄낄대면서 퍼 나르지도 않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유해한 콘텐츠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은 지나친 과장, 무효용, 공포 조장 등이다. 동일한 '노산'이라는 주제를 다룬다고 해도 균형 잡힌 시각을 제공하고, 도움이 되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며, 불필요하게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다면 아주 유익한 콘텐츠이다.


나는 오늘을 끝으로 '잔인할 정도로 충격적인 노산의 진실.jpg'를 인터넷 공간에서 영영 보지 않기를 바란다. 나 자신도 그런 무가치한 게시물에 더 이상 시간을 쓰지 않기를 바란다. 진실된 정보가 필요한 이들은 전문가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구하고, 당사자가 아니라면 굳이 나서서 재판관을 자처하지 않기를 바란다. 설령 그 좀비가 끝끝내 또 살아 돌아와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사라지기를 바란다. 분노도 희열도 일으키지 못한 채로, 그저 지나간 헛소리 취급당하고 파묻히기를 바란다. 근거 없이 공포와 혐오를 조장하는 콘텐츠를 인터넷 생태계에서 무반응으로 밀어낼 때가 되었다. PS. 그래도 괘씸해서 댓글을 달고 싶다고? 아, 그렇다면... 이 글을 공유해 주길 정중하게 부탁드리는 바이다. 노산모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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