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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의 Aug 18. 2024

저출산, MZ세대와 불화하다 [2] 경쟁

왜 젊은이들이 아기를 낳지 않는지 물으신다면...

2. 경쟁


아기가 다니는 어린이집 친구 한 명이 다음 달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인가 싶어 살짝 물어보니, 앞으로 영어 어린이집(?)을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 아니, 그런 게 있어요...??? 예닐곱 살 어린이들이 영어 유치원을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두 돌 남짓 아기가 영어 학습 기관에 간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 얼떨떨한 나의 질문에 그 아기의 할머니가 딱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으이구, 젊은 엄마가 아무것도 모르네!


우리 사회의 영어 교육열은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과경쟁의 대표적인 예시가 아닐까 싶다. 시험용 영어는 지문을 과하게 꼬아 놓다 보니, 무난하고 정상적인 글과 대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결국 영어 시험공부는 영어로 원활히 소통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아니다. 누구를 1등 자리에 앉혀줄 것인지 결정할 방법으로 성적을 기준 삼는 이상,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변별력을 만들어내야 한다. 게다가 영어 유치원으로 대표되는 영어 조기 학습은 일단 비용이 엄청나다. 아기들은 - 정확히는 양육자들은 - 생각보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경쟁을 시작한다. (영어 어린이집... 몰랐던 사람 진짜 나밖에 없나?) 그래, 너무 과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다. 집단 내 서열 경쟁은 언제나 상대 평가이기 때문이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을 살펴보면, 다른 모든 동물처럼 생존과 번식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중에서도 본인과 자식의 '진화적 적합도'를 높이는 것은 최우선 과제이다. 적합도란 잘 생존하고 잘 번식할 확률로 이해해도 된다. 쉬운 말로 '생물학적으로 잘 나가는 것'이다. 물우리가 의식적으로 '후훗, 끝없이 번식해서 나의 유전자를 후대로 퍼트려야지!'라고 결심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합도 경쟁이란 틀에서 인간의 욕망, 행동, 사회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도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게다가 호모 사피엔스는 연약한 자식을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키워야 하는 종족이다. 이렇게 '거액 투자'를 하는 만큼, 자녀가 성공적으로 번식하도록 집단 상위 서열을 획득하는 것은 자연스레 근원적 욕망이 된다. 


자손을 통한 적합도 경쟁 자체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리고 그 경쟁이 과열되는 것도 생물계에서 어느 정도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부모의 뇌는 자녀의 성패에 민감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자연 상태에서 아기의 사망이 흔했기 때문일 것이다. 애써서 낳고 기른 자식이 생식 연령에 다다르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진화적 견지에서는 가장 큰 실패나 다름없다. 그러니 부모는 2세가 오랫동안 생존하고, 건강과 안녕을 유지하며, 집단 내에서 우위 서열을 확보해서,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번식이 가능하게끔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그런데 불과 최근 200년 사이에 보건, 의료, 기술 등이 발전하며 영아 사망이 극적으로 감소했다. 현대에 이르러, 유년기의 내재적 취약성 탓에 죽어버리는 아기는 아주 적어졌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지만, 대신 양육자는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와 자원을 경쟁 우위 확보에 퍼붓게 되었다. (다른 아기가 2살부터 영어 교육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나도 우리 아기를 영어 학습 기관에 보내야 할지 고민을 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 애만 뒤쳐지면 안 되지!) 이상한 일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무탈히 살아남는데, 집단 내부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가혹해졌다.


진화학자 장대익 교수에 따르면, 사람들은 경쟁이 과도할 때 출산을 주저하게 된다. 출산하고 양육하기엔 환경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더 나은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만약 출산을 한다고 해도, 아이의 수가 적은 것이 유리하다. 그래야 그 적은 수의 아이들에게 최대의 투자를 해서 적합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 사회는 수도권에 인구가 대단히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개인은 인구 과밀에서 비롯된 극심한 경쟁 피로를 느낀다. 그에 따르면 저출산은 일종의 진화적 적응 현상이다. 또한 과도한 사교육 경쟁, 수도권 집중화, 낮은 출산율이 별개의 문제가 아닌, 하나의 총체적 현상이다. 


오늘날 문명화된 인간 집단에서 성행하는 유전자들은
부모의 사랑이라는 얼굴을 한 채로
자신들의 전달체인 자녀들에게
교육이라는 군비경쟁의 채찍질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최정균. 『유전자 지배 사회』중에서


좁은 곳에 복닥거리며, 비정하게 경쟁하는 사회에서는 다른 정서도 파생한다. 논리, 효율, 공정에 대한 집착이다. 이런 것들은 MZ 세대의 가치관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여러 번 제시된 바 있다. 물론 세상에는 논리를 따져야 하고, 효율이 높아야 하고, 온전히 공정해야 하는 일들도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자. 애 낳고 키우는 것이 어디 논리적이거나, 가성비가 좋거나, 공정하게 부담을 '반반' 나눌 수 있는 일이던가? 경쟁에 익숙한 세대에게, 임신-출산-육아라는 경험은 기존의 룰을 무시해 버리는 파괴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


또한 과도한 경쟁에서 파생한 중요한 감각 중 하나가 탈락에 대한 높은 공포다. 탈락에 대한 공포는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당연히 생식 활동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과경쟁 사회는 불안을 조장한다. 영어 유치원에 안 가면, 우리 아기만 뒤쳐질지도 몰라. 이것은 악순환이다. 불안하니까 결과적으로 더 경쟁 우위 확보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도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아기를 낳고 기르기에는 환경이 매우 나쁘다고 지각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지표상 환경이 불리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출산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환경이 나쁘다는 '인식'이다. 사실 한국인들은 평균적으로 소득도 높고, 한국 사회엔 영유아를 위한 복지도 어느 정도는 갖춰져 있다. 아기를 다섯 낳을지언정 그들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의 획일도가 너무 높다 보니 모두가 비슷한 가치, 비슷한 우위를 점하길 원한다. (명문대, 대기업, 서울 아파트...) 결국 체감하는 경쟁 정도가 매우 가혹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이렇듯 삶의 기반이 불안정하다고 간주할 때엔, 예측하고 통제하는 일에 더 목을 매게 된다.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경험 전체가 정확히 예측하고 제어할 수 있다면, 그나마 긍정적인 신호가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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