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의 쓸모(feat. 집요함)
입버릇처럼 주변 친구들이 하는 말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일단 의심부터 하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의심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검색해서 상대방의 말이 얼마나 신뢰성이 있는지 따지고 드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내가 봐도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피곤하다 싶을 정도로 파고든다. 심지어 상대가 누구 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일례로 공익 시절 같이 근무하던 A와 트러블을 빚은 적이 있다. A는 스스로 공고 출신에 특례로 연세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배울 게 없어 중퇴했다고 말했고, 프리랜서 사진작가로 일하며 자기가 찍은 사진이 공공기관에 걸리기도 했고. 책도 출간했다고 했다. 그 외에도 사진과 산악자전거, 유도 등 동호회를 몇십 개에 참여하고 운영도 해보았다고 말했다.
동호회 활동을 여러 개 병행했다는 얘기부터 의심이 시작됐다. 당시 단과대 신문사와 대학교 연합 볼링 동아리 2개를 하고 있었는데 종종 친구들에게 ‘신문사가 좋아 볼링이 좋아?’ 소리를 들을 만큼 둘 다 완벽하게 참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동호회를 한두 개도 아니고 몇십 개씩이나? 그것도 운영진도 하면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A가 말한 다른 활동들도 미심쩍었다.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교보문고, YES24 등 주요 서점에서 사진 카테고리에 A의 이름으로 책을 검색했으나 나오지 않았고, 구글, 네이버 어디에서도 A가 찍었다는 사진도 찾을 수 없었다. 산악자전거를 타고 관악산을 오르기도 하고, 속초를 하루 만에 왕복했다며, 등산하는 사람들을 무시할 때는 바로 네이버 길 찾기에서 자전거 소요시간을 체크하고, 자전거 동호회를 하던 지인들에게 물어봤다. 지인들은 하나같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도로가 좋아진 지금도 16시간 22분이 나오니, 불가능한 일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A가 특례입학으로 연세대학교에 갔다던 발명대회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가 다녔다던 공고에서도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 대통령상을 받을 정도면 고등학교에 큼지막하게 플랜카드도 걸리고, 뉴스 한 줄 정도는 나올 법도 한데 아무 흔적도 없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 그때부터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졌다. ‘아 이 새x 구라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뀐 뒤부터는 건건이 A에게 증명해 보라며 던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유도를 배워서 낙법으로 스타렉스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했을 땐 “오 x라 멋있네. 좋은 구경 한 번 합시다. 한 번 보여줘.”라며 부추겼으나 A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끝내 낙법을 보여주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옛날에 가능했다.’라고 했다면 모를까 170 중반의 키에, 100kg에 육박하는 몸으로 비만 소대를 나온 A가 낙법으로 스타렉스를 넘을 수 있을 리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A는 증명하지 못했다.
나이도 자신보다 어린 내가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집요하게 따지고 들자 A는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내가 예민하고, 싸가지가 없다는 식으로 몰아갔고, 덕분에 1년 동안은 다른 공익 동료들로부터도 눈총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결과적으로는 내 의심이 증명되었고, A가 소집해제하던 날 A를 제외하고 새롭게 단톡방을 개설할 만큼 A는 철저하게 다른 동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왜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끼친 것도 없는데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지 시간 들여가며 따지고 드느냐고. 왜 쓸데없이 적을 만드냐고.
인정한다. 내가 봐도 피곤한 성격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게 내 성격인 것을. 단순 호기심보다는 의심이 시작이었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팩트를 체크해야만 했다. 내가 잘났다고 뽐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쓴 글을 읽어본 W형이 ‘네 글에는 한(恨)이 담겨 있다.’라고 평할 만큼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내 의견, 내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받아왔기 때문이다. 한이라고 표현할 만큼 억울했고, 분했고, 화가 치밀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집요해져야만 했다.
마치 완전 범죄를 꿈꾸는 범죄자의 트릭을 풀어내기 위해 아주 사소한 한 마디, 동작 하나, 습관 하나까지도 디테일하게 뜯어보는 탐정처럼, 상대방이 인용한 통계 자료, 명언, 개념 등을 하나하나 뜯어봐야 했다.
필요 이상으로 사람을 의심하고, 집요하게 따지고 드는 성격 덕분에 적이 많았다. 겪지 않아도 될 갈등을 겪었고, 그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끝없이 의심한 덕분에 남들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되었고, 집요하게 파고든 덕분에 남들보다 많은 사례를 추가할 수 있게 되었고, 논리를 강화할 수 있었다.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이 아니었다면 ‘하루 1시간 책 쓰기의 힘’이라는 책도 그냥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퇴사 후 어떻게든 진짜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에 드라마 작가 교육원도 다니고, 책 쓰기 관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도움이 될만한 실용적인 팁도 있었지만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다.”라면서 “경험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의 사례를 인용하면 된다.”라는 저자의 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조금만 스피치나 글쓰기 관련 공부를 해봐도 다양한 사례를 인용하라는 말은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실제로 순간의 힘, 스위치, 말은 운명의 조각칼이다 등의 자기 계발서 등에서도 수많은 사례가 등장한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 저자는 도대체 몇 개의 사례를 인용했을까? 몇 개의 사례가 있으면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까? 무려 4시간 동안 다시 처음부터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인용한 통계 자료, 명언, 다른 사람의 사례 등을 엑셀로 하나하나 정리해 봤다. 세어보니 총 101개였다. 그중에는 스티브 잡스. 앤디 워홀 등 내가 아는 사람들의 명언도 있었고, 이런 책도 있었나? 싶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책과 저자의 이야기도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엑셀 파일을 다시 열어보기 전까진 101개의 사례 중 단 한 가지 사례도 기억나지 않고, 두 번 다시 101개의 사례를 뜯어볼 일은 없을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막연하게 ‘많은 사례를 인용한다.’라는 문장은 추상적이라서 뭐랄까 선뜻 타자를 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반면 ‘책 한 권에는 100여 개의 사례, 3페이지 당 1개의 사례가 등장한다.’는 문장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비록 한 권을 분석했을 뿐이지만 구체적인 수치를 보니 뭔가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남들이 쓸모없다고 말했지만, 내 나름대로 쓸모 있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고,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을 말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라든가, ‘순간의 힘’이라는 책을 쓴 칩스 형제라든가 ‘Connecting the Dots’을 말한 스티브 잡스 등등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으며, 그들에게 닿는 과정조차도 남들이 쓸모없다 말하던 순간들이었으니까. 그 사례들을 모으고 모아보니 나 역시 100여 개쯤 사례를 모았다. 그렇다면 나도 책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옛말에도 삼인성호란 말이 있지 않나. 사람 셋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는데 100개의 사례가 모이면 모든 순간이 쓸모 있다는 말도 마냥 허황된 말은 아닐터다.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불안함이 있다. 나 까짓 게 뭐라고 책을 쓰겠다고 하나.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시큰둥한 주변 반응들도 있기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그래도 써보련다. 이조차도 시간이 지나면 다 쓸모 있는 이야기가 될 거라 믿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