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결정. 그리고 바퀴벌레와 같은 생존력.
창업가로서 버틴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은
나 홀로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다.
14년에도 혼자 사업을 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한가지.
"그냥 내가 입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어서"
그때는 지금처럼 인스타 시절이 아니라서 개인이 의류를 만들어서 판매한다는 것은
초기비용이 꽤 많이 들었다.
그리고 단순 의류 제조업이었기에 정부지원사업을 받기에도 여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 이야기를 조금 해보고자 한다.
약 6년동안 10군데 이상의 회사를 다닌 사람은 대한민국에서 나말고 또 있을까,
수능도 두번이나 더 치르고 세종대 패션디자인학과에 들어갔다.
그러나 운이 좋게 3학년때 켈빈클라인 한국본사에서 VMD(신규매장 설치, 상품 디스플레이 등 Visual Merchandising)로 정규직 제안을 받았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은..
알바를 하던 중, 정규직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우리 팀의 여자 부장님이 이렇게 물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 편집장 '미란다' 동양인 버전인 여자 부장님)
"너는 어떤 자격증이 있니? 영어점수는? 운전면허증은? 이력서에 안써있길래"
"네.. 하나도 없어서 안썼습니다.."
성격탓일까,
그냥 나를 점수로 메길수 없다는 철부지 생각에 나 혼자 준비는 했지만 점수를 따려고 하질 않았다.
그렇게 약 1년 넘게 첫 직장 생활을 했는데
다른 부서의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일 할만 해?" 라고 물으면 이상하게.. 눈물이 먼저 주르륵 흘렀다.
무슨 일을 했는지보다.. 화장실 한번 가는게 눈치보여 12시간 동안 한번 화장실 갔던 기억이 더 또렷하다.
외주업체가 과일이라도 챙겨서 사무실에 방문하면, 그 과일을 깍아 전 부서에 돌리는 등. 초반에는 일이 아닌 눈치를 배우고 힘들어도 천하무적의 방끗 웃는 막내의 가면을 배웠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하다보니 졸업준비를 못한 탓에 학점을 못채워 난 또 학교를 더.. 다녀야했다.
흠, 위기가 기회였을까.
대학생이란 신분으로 졸업 직전에 지원한 공모전에서는 '대상'을 수상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LG fashion(현, LF)에서 주최한 첫 공모전이라서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 수상으로 한국의 첫 직장과 같은 켈빈클라인 뉴욕 본사로 날 보내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지금의 내 청바지 사업(온라인 사이즈 문제해결)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건 우연의 일치일까..
아무튼, 그렇게 자격증 아닌 이력서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이 후, KENZO/ Sonia Rykiel/Colombia 등을 바잉해오는 회사에서 상품을 기획하는 MD로 일했는데
역시 패션 회사는 여자들 세상이다.
세상 기 쎈 언니들이 그 얼마나 불편한 하이힐을 신고 그 누구보다 흩뜨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일하는 지..
이 곳은 다름아닌 패션 회사의 일상이다.
약 1년을 일했을까, 회사가 힘들어져 롯데에 인수되기 시작했는데
가장 최근의 막내가 나여서인지, 하루 아침에 실업급여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회사에서.. 짤렸다.
뭐 어쩔 수 없지,
이제 뭘 해볼까?
(기존 글에서 순서 수정)
2년 반 만에 3번째 직장. 소재 프린팅공장 공순이 입사
다양한 원단에 디자인을 프린팅, 출력하는 소재공장에서 일하기 위해 난 일산에서 수서까지 왕복 4시간을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아빠의 말이 생생하다..
"내가 너 공순이로 일하라고 4년제 대학 보냈니!!???"
물론, 다른 사람 말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나로썬
여기에서 또 재밌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여성창업가가 되기까지(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