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기생충」을 중심으로
Ⅰ. ‘하면 된다’는 이데올로기
노동자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집단적 폭력혁명으로 계급사회를 타파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매력적인 제안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의 각성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사회 혁명은 일정 규모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봉준호 감독 또한「설국열차」에서 자급자족 시스템을 갖춘 채 무한궤도를 도는 ‘윌포드 열차’ 즉, 신자유주의를 궤도에서 탈선시키는 결말을 택했다. 이는 의도된 체제의 전복이 아니었다. ‘크로놀’의 물리적 폭발을 막을 문이 고장나버린 것은 계획에 없던 ‘사고’이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의 폭력 혁명, 계급 혁명은 사실상 머리칸 앞에서 보류되거나 연기 심지어는 파기된 셈이다.
봉준호는 2019년「기생충」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메시지를 다시 한 번 던진다. 그는 작품의 제목을 왜 ‘기생충’으로 지었냐는 질문에 ‘요즘 시대에 함께 뒤섞여 살아가는 데서 오는 피로와 어려움에 관한 이야기’, ‘우아한 공생이나 상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기생의 처지로 내몰리는 어떤 상황과 사건과 소동을 다루는 영화’라고 대답했다.(1) 그렇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생의 처지로 내몰리는’ 이유를 찾아 읽어야 한다. 그리고 필자는 그것을 ‘불안정 노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이후에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경계 또한 모호해졌다.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일하고, 고정적 임금을 받던 구조가 다양하게 변모했기 때문이다. 이에 불안정 무산 노동자를 칭하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하면 된다’는 이데올로기를 개인과 사회에 지속적으로 주입한다.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은 사회의 미덕이 된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들끼리 경쟁한다. 경쟁에서 밀려나면 도태된다. 생존의 위협 앞에서 모든 것은 개인의 노력 혹은 능력 탓으로 귀결된다. 경쟁을 통해 얻은 권리는 보편적 권리가 아닌 승자의 특권으로 인식된다. 다른 노동자, 다른 계급, 비합격자 등에 대한 차별은 차이로 둔갑한다.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구조는 필연적인 것이 아님도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 자체로 성공적인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프레카트리아라는 계급은 무엇이고,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가. 또한 그것이 노동자간의 연대를 분열시켰고 생존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사회적 불안이 되고, 더 나아가 재난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는 사회적으로 응축된 차별과 혐오가 불특정 다수에게 재난에 준하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봉준호의「기생충」을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Ⅱ-ⅰ. 노동 불안정화와 계급구성의 변화
기택 부부는 ‘건강은 하신데 일거리가 없’다. 기택의 가족 모두 일정한 직업 없이 피자박스를 접는 등의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고정적인 수익이 없기에 기정은 ‘학원을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간다. 기우는 4수생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노동력을 제공한 댓가로 임금을 받는 사람은 모두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기 때문이다. 반면 박 사장은 그를 부르는 호칭처럼 ‘Another brick(2)’의 CEO이다. 물론 그가 과거처럼 물리적인 생산수단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지는 명확치 않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지적, 정신적, 경제적 가치의 독점을 통해 부를 축적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는 부르주아에 가깝다.
박 사장의 계급은 전통적인 마르크스 이론으로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편법 혹은 불법을 통해 박 사장의 집에 취직한 기택 일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과외 선생님, 미술 치료 선생님, 가사 도우미, 운전기사 모두 생산수단을 가동하기 위한 직업이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3) 이처럼 다양해진 노동자의 형태를 마르크스의 고전적 개념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워졌다. 이에 가이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라는 새로운 계급을 제시한다. 가이스탠딩의 정의에 따르면 자신이 바라는 경력이나 정체성을 쌓는 데 도움이 안 되는 불안정한 형태의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든 프레카리아트이다.(4) 물론 이들 또한 생산수단이 없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고전적 프롤레타리아라고 볼 수 있다.
노동의 조건이 변화하면서 계급구성을 생산수단의 소유로만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가이스탠딩은 “계약 기간이 길고, 안정되고, 노동시간이 정해진 일자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승진이 보장되고, 노동조합 가입 대상이자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고, 부모가 알 만한 직함을 갖고 있으며 이름이나 특징이 익숙한 국내기업에 고용되는” 사람들만 노동계급으로 규정한다.(5) 간단히 말해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에 정규직으로 채용된 사람만이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이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에 따른다면 기택의 가족은 프레카리아트가 된다.
기택 일가족은 박 사장의 집에 들어간 후 전문 용어를 쓰려 노력하고, 말 사이에 짧은 영어 단어를 섞어 쓴다. 양복이나 드레스를 주로 입는 등 박 사장 집 사람들의 말과 옷차림을 따라한다. 또한 기택의 가족은 다른 노동자에 비해 비교적 높은 소득을 받고 일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경제적 소득의 증가와 외적 변화가 사회적 계층까지 한 순간에 바꿔주는 것은 아니다. 기택이 박 사장의 차를 몰다 화물차가 끼어들자 ‘에이 시발’하고 외치며 본래의 성격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처럼 그들은 언제든 원래의 계층으로 추락할 수 있다. 기택의 가족이 김 기사와 문광을 하루아침에 쫓겨냈던 것처럼 본인들도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프레카리아트이다.
Ⅱ-ⅱ. 신자유주의적 욕망 내면화
기택의 가족은 피자 박스를 접은 돈을 받아 “핸드폰은 재개통, 그리고 쏟아지는 와이파이를 축하하며“ 맥주를 마신다. 이 때 마시는 맥주는 필라이트인데, 맥아 함량이 10% 미만인 발포주이다. 낮은 맥아 함량 때문인지 ‘맥주’가 아닌 ‘기타 주류’로 분류되어 있다. 맥주지만 진짜 맥주는 아닌 셈이다. 기택 가족이 박 사장의 집에 일하며 비슷한 사회, 경제적 지위를 획득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근본적인 삶에는 변함이 없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시에 일반 맥주를 사 마시는 데에 주저할 정도로 경제적 환경이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택의 가족이 박 사장의 집에 모두 취직 한 후에 다시 한 번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다. 이 때 가족이 앉아있는 자리나 카메라의 구도는 동일하다. 변한 게 있다면 뒤편에 산수경석이 놓여지고, 필라이트가 아닌 아사히 맥주를 마신다는 점이다. 봉준호 감독이 디테일에 많은 신경을 써 ‘봉테일’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택의 가족이 마시는 맥주 또한 단순한 소품 이상의 의미를 지녔을 가능성이 높다.
기우는 산수경석을 선물 받은 이후 민혁의 욕망을 모방한다. 민혁처럼 되고 싶어 한다. 이는 기우가 민혁과 관련된 언어를 모방한다는 것을 통해 드러난다. 민혁이 기우의 집에 수석을 들고 찾아온 날 ‘정신 차려 정신!’하고 소리치는데, 이때 기우는 놀란 눈으로 기택을 쳐다보기만 한다. 그러나 기택이 박사장 집에서 일하게 된 이후에는 태도가 바뀐다. 취객이 다시 나타나자 기우는 산수경석을 들고 나가 취객에게 ‘야! 야! 정신 차려! 정신! 야!’라고 소리친다. 민혁이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한다. 다혜와의 첫 과외 날에도 다혜의 팔을 잡고 ‘실전은 기세야. 기세. 알겠어?’라고 말한다. 이 때 사용한 ‘기세’라는 단어도 민혁이 기우에 집에 방문한 날 목소리로 취객을 제압하자 충숙이 ‘역시 대학생이라 그런지 기세가 다르다 기세가’라고 했던 말을 똑같이 쓴 것이다.
기우는 민혁의 언어를 모방 혹은 응용함으로써 민혁의 욕망을 욕망한다. 민혁이 좋아한다고 밝혔던 다혜와 결혼 할 것이라고 말하고, 박 사장의 집이 자기 집이 될 수 있다는 미래까지 계획한다. 이를 고려한다면 산수경석은 기우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게 하는 계기로 볼 수 있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의 진입은 언어의 습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라캉의 의견처럼 기우는 민혁의 언어를 습득하며 새로운 욕망을 꿈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산수경석은 기우에게 ‘대상 a’가 된다. 대상 a는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나의 억압된 욕망과 나 자신을 대면시키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6) 노력하면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욕망을 내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우의 욕망은 한국 사회가 ‘사람이라면 이래야 한다’고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욕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명문대에 합격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뿐, 기우가 대학에 가려고 하는 이유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 기우의 욕망이 좌절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은 여럿 등장한다. 우선 기우와 기택이 취객을 제압할 때 기정은 그 장면을 카메라로 촬영하며 ‘오 완전 물바다야. 으.’라고 말한다. 이 장면은 실패의 예고편에 가깝다. 기택이 뿌린 물을 기우가 뒤집어쓰게 되는데, 기정의 ‘물바다’라는 표현 또한 그들에게 찾아올 미래, 즉 자연재해로 인한 침수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저는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 라는 기우의 말에 ‘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고 반응하는 기택의 말도 마찬가지다. 기택의 말은 폭우로 집이 침수된 뒤 강당에서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노플랜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 되거든 인생이.’ 라고 말하는 것과 이어진다. 즉 기택은 이미 신분상승이나 생활의 개선이 좌절되는 경험을 반복해왔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단순히 기택의 개인사라기보다는 ‘치킨 망하고’ ‘카스테라 망한 뒤’에 ‘발렛’까지 해야만 했던 수많은 프레카리아트들의 운명을 대변하는 발언에 가깝다. 그리고 아무것도 물려준 것 없는 기택을 아버지로 둔 기우는 오직 프레카리아트라는 계급만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크다.
기우는 4수생이다. 반면 민혁은 입시제도를 성공적으로 통과해 명문대 학생 되었다. 공식적인 시험을 통해 취득한 학력 자본을 기반으로 부자집 과외를 하며 경제적인 부 또한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이처럼 대학 입시제도는 세계를 합격자의 세계와 불합격자의 세계로 나눈다.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들어가려면 시험을 쳐야만 한다.(7) 대한민국 사회에서 시험은 기득권 핵심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공인된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민혁은 과 동기들을 ‘우리과 공대생 그 늑대새끼들’이라고 표현한다. 이어 ‘솔직히 시발 잉글리시? 네가 열 배는 더 잘 가르칠 걸. 매일 같이 술 쳐먹는 대학생 십새끼들보다?’고 말한다.
민혁의 말처럼 대학 입시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대학 입학 후에도 성실히 학업에 임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기우 또한 기우는 위조된 증명서와 민혁의 추천으로 박 사장 집에 과외선생님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아버지 저는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기우는 4수를 준비하면서도 명문대를 꿈꾸는 계급 상승에 대한 욕구가 강한 인물이다. 그러나 합격을 증명하는 서류와 지인의 추천 없이는 그런 기회를 얻을 수조차 없다는 걸 고려한다면, 대규모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는 공채 제도의 결과로 ‘역동성이 점점 사라지고 우리 공동체가 계급사회 같은 모습으로 굳어지(8)’고 있다 볼 수 있다.
Ⅱ-ⅲ. 연대의 분열, 생존을 위한 몸부림
지하실 문이 열리고 문광의 존재가 폭로되는 순간 영화는 새로운 기점을 맞이한다. 반지하에서 살았던 기택의 가족처럼 박 사장 집 지하에는 사업에 실패한 오근세가 살고 있다. 당황해하는 충숙에게 문광은 ‘압니다. 황당하신 거. 저라도 황당할 거 같아요. 같은 일 하는 사람끼리. 그죠 충숙이 언니.’ 하며 같은 계층의 노동자임을 강조한다. 또한 ‘언니’라는 호칭으로 친근감을 조성한다. 그러나 충숙은 ‘근데 이제 어쩔 거야. 나도 알았으니까. 나는 전화를 할 수밖에 없어 경찰한테’라며 매정한 모습을 보인다. ‘언니 제발. 불우이웃끼리 이러지 말자 언니야.’하며 무릎을 꿇고 빈다. 충숙과 문광 모두 사회적 약자임을 토대로 넘어가주기를 비는 것이다. 전통적인 마르크스 이론에서는 둘 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기에 이들은 연대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충숙은 ‘난 불우이웃 아니’라며 계급간의 연대 자체를 거부한다.
그러다 기택과 기우, 기정이 계단에서 미끄러져 내려온다. 문광은 ‘야 너네 뭐 일가족 사기단 뭐 이런 거냐?’며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기우는 ‘아주머니 우리 이야기 좀 해요’라고 하며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충숙 또한 말투를 바꿔 ‘저기 동생’ 하며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뒤집혔다. 문광은 ‘동생은 얼어 죽을 아가리 닥쳐 이 개쌍년아. 내가 찍은 거 이거 사모님 번호로 전송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쇼?’라며 이미 주도권이 본인에게 넘어왔음을 시사한다. 기택이 ‘저기 아주머니 사실은 저희가 너무나도 그 여기서 일자리를...’하고 다시 한 번 대화를 시도하지만 ‘시끄러 듣기 싫고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다 같이 경찰서 가든지 감방에 가든지 이 참에 에브리바디 끝장을 보자 이거야.’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 혹은 프레카리아트가 자발적으로 계급의식을 단련하여 압제자들에 맞서 폭력 혁명을 일으키고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9)해 내리라는 믿음이 이미 무너졌음을 드러낸다.
문광 또한 기택과 같이 ‘대만 왕 수익 카스테라 가게’를 열었다 망했다. 문광은 이 때 진 빚 때문에 4년 3개월하고 17일째 지하에서 살아가고 있다. ‘왕 수익’이라는 것은 아마도 해당 프렌차이즈 가게에서 내새운 캐치프라이즈 혹은 광고 문구로 추정된다. 누구나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투자자들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자유주의가 만든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열심히 일 하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럼에도 신자유주의는 ‘하면 된다’는 식의 이데올로기를 계속해서 주입한다. 이에 문광이나 기택 같은 사람들이 많은 돈 혹은 정기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에 ‘대만 카스테라 가게’를 열지만 그 믿음은 실패로 돌아올 뿐이다.
마찬가지로 기택은 무언가를 계획해서 계획대로 성취해나간다면 사회적인 성공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박 사장의 집에 면접을 갈 때에도 ‘아버지 저는 이게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 내년에 이 대학 꼭 갈 거거든요.’라며 미래의 계획을 말한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기우는 아버지가 살인을 저질러 지하실에 사실상 갇혀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기우는 그 방법으로 '부자가 돼서 그 집을 소유하고 아버지는 계단만 올라오시면 된다'라고 말한다. 자본의 문제로 일어난 문제를 자본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 3>과 <그림 4>가 모두 반지하 창문을 보여주듯 모든 건 제자리다. 기택의 가족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지만 기정은 죽고 기택은 지하에 갇혔다. 기생충의 원래 제목이 데칼코마니였다는 것은 이러한 장면이 섬세하게 의도되었음을 반증한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우는 잘 되어봐야 아버지를 구출해내고 한국사회에서 정상가족으로 보여지는 가족 공동체를 회복할 수 있을 뿐이다. 약 4인 안팎의 가정, 가족 구성원의 안정적인 경제 활동,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부부 형태 즉, 남성, 이성애 중심의 구조가 ‘정상’적인 가족 형태로 여겨진다. 기택의 가족이 기사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많이들 먹어라 실컷. 자 우리 아들 더 먹어둬 더 먹어. 많이 먹어.’ 하며 기우에게만 고기를 더 얹어주는 것 또한 이런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10)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에 매력적인 답변으로 ‘혁명'을 빼놓을 수 없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계급에 대한 피지배자들의 혁명으로 읽어내는 것이 가능한 영화였다. ’멈춰서는 안 되는 엔진과 무한히 움직이는 열차의 궤도'는 신자유주의가 성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환상 혹은 멈출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도 읽을 수 있다. 성장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자본의 한계를 모두 알지만,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꼬리칸’의 사람들은『기생충』의 두 가족과는 달리 하나로 연대하여 엔진칸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폭력 혁명을 통해 생산수단을 점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의 노동하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꼬리칸 사람들 또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를 『기생충』과 함께 놓고 본다면 복잡해진 노동 형태를 반영하려는 시도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맨 뒤칸에서 앞칸으로 마치 게임의 스테이지처럼 하나씩 진행해 나가던 방식이 이제는 위와 아래라는 횡적 움직임이 더해졌다고 볼 수 있다.
『기생충』은 애초에 혁명을 선택지에 올려놓지도 않는다. 부잣집에 기생하고 있는 피지배층끼리 이해관계 앞에서는 서로를 모욕하거나 회유하거나 죽이기까지 한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계급'이라는 거대한 틀로 쉽사리 묶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모욕이나 절대빈곤, 지배자의 자의적인 생사권 등은 열차 내에서 혁명을 일으킬만한 충분한 동력이 되지만 기생충의 사회엔 그럴 동력도 계급도 없다. 오히려 생사권을 놓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목숨을 건 경쟁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도리어 본인들의 생사권이 달린 문제 앞에서 지배층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기택은 동영상을 박 사장에게 보내겠다고 협박하는 문광에게 ‘아줌마 미쳤어 지금? 그런 동영상을 보시면 박사장님하고 사모님이 얼마나 놀라시겠어. 그 착하신 분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분들한테 왜!’고 말한다. ‘위대하신 박 사장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기택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거짓말이라고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근세는 옆구리에 칼이 꽂힌 상태로도 박 사장을 보자 ‘리스펙트’를 외친다. 이처럼 노동자 계층에게 박 사장은 대립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에게 먹고 살 공간 혹은 임금을 주는, 존경해야 하는 존재인 셈이다.
Ⅱ-ⅳ. 사회적 불안과 불만의 재난화
기택은 다른 사람에게 동질성을 가지려 하는 인물이다. 박 사장의 운전기사로 처음 일하게 된 날에도 ‘한 집안의 가장, 한 회사의 총수, 또는 그냥 고독한 한 남자와 매일 아침 이 길을 떠난다. 이건 일종의 동행’이라며 박 사장과 자신 모두 남자 혹은 가장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또한 근세가 ‘제가 죄인’이라며 ‘대만 왕 수익 카스테라 가게가 망해갖고 빚을 좀 심하게 졌’다고 말할 때 기택은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 또한 한 명의 가장으로써 실패의 경험을 함께 해본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질감은 연대로 발전하지 못한다. 박 사장에게 기택의 발언은 ‘선을 넘는 것’에 불과하다. 섞일 수 없는 다른 계층을 함부로 넘보는 행위인 것이다. 실제 집안일을 하던 문광이 쫓겨나자 박 사장은 ‘잡인이 완전 쓰레기통’이 되고 다솜이 엄마가 ‘청소도 못하고 음식도 맛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기택은 ‘그래도 사랑하시죠?’하고 묻는다. 이 때 박 사장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싸늘한 웃음을 짓다가 ‘그럼요. 사랑하죠. 사랑이라고 봐야지’하고 대답한다. 노동자 혹은 가장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한 기택의 연대는 계층 앞에서 철저히 무시된다. 심지어 박 사장이 일방적으로 기택을 해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기에 둘의 위계는 줄어들기 어렵다.
근세에 대한 연대 또한 불가능하다. 문광의 가족과 기택 가족 모두 박 사장의 집에 ‘기생’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생존 방법이다. 두 가족은 생사를 걸고 경쟁한다. 술병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복숭아 알러지를 유발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프레카리아트에게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 경쟁에서 지는 것은 사실상 생사권을 박탈당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그러나 경쟁과 생존이 최우선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 아름다운 연대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그들은 낙오될 수 있다는 상시적 불안과 위험에 지배되어 자기착취를 계속한다. 그러나 그 결과 이득을 보는 건 자본뿐이다.(11)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위험이 함께 하는 프레카리아트 계급에게 계급 혁명이란 철 지난 이야기에 가깝다.
기택이 박 사장을 살해했으나 그것은 우발적인 사건에 가깝다. 기택의 가족은 집이 물난리로 침수된 다음 날에도 생일파티를 하는 박 사장 집에 출근을 해야 했다. 평소처럼 연기를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연교는 기택에게서 나는 냄새 때문에 창문을 여는데, 이를 기택도 눈치 챈다. 냄새가 ‘선을 넘는’ 순간은 박 사장이 차 키를 가져가기 위해 근세의 몸에 손을 댈 때 극대화 된다. 박 사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코를 막는데 이 순간 박 사장이 기택을 칼로 찌른다. 프레카리아트 계급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심리적 불안이 순간 선을 넘은 것이다.
박 사장은 처음 온 과외 선생님인 기정을 집에 데려다 주라고 지시한다거나, 윤 기사를 해고할 때에도 큰 문제가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사람이다. ‘부잔데 착하’든 ‘부자니까 착한’것이든 그들은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고의로 위력을 행사한 적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적인 불안과 구조적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본인들에게 재난으로 찾아온다. 박 사장은 칼에 찔려 죽었고, 다송이는 ‘트라우마 극복 케이크’를 받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근세를 마주친다. 선을 넘지 않도록 경계해 보아도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박 사장의 가족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 또한 이 사회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Ⅲ. 차별과 혐오가 선을 넘는 순간
최근 한국 혹은 세계에서 인기를 얻은 영화들에는 미묘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특정 계급이나 특정 성별 등에 대한 차별이 사회 문제가 되었을 때, 이것이 불특정 다수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기생충」에서는 이를 ‘대낮의 고급주택가 칼부림‘으로 헤드라인으로 달고 “고급 주택가의 한복판에서 묻지마 흉기 난동이 발생한 건 매우 이례적’이라고 보도한다. 나와는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사회, 경제적 불안이 다른 계층 혹은 사회 전반에 예측할 수 없는 재난으로 작동될 수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선한 개인이라 하더라도 구조적 모순에 무관심하거나 침묵했을 때 그것이 가져 올 사회적 재난에 대해 경고한다.
토드 필립스의「조커」(2019) 또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압박이 누적되고 거기에 가정사로 인한 정신질환이 덧붙여졌을 때, 그리고 이를 사회가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때의 문제를 드러낸다. 조커를 방치한 사회는 도시적인 재난 상태에 빠졌고, 조커를 이용하려 했던 머레이 프랭클린과 그를 무시했던 랜들은 조커의 총에 맞아 죽는다. 「82년생 김지영」도 마찬가지다. 여성에게 가해졌던 차별들을 외면했을 때 결국 함께 병에 드는 건 사회 전체 그리고 그 사회의 구성원 모두라는 것을 보여준다.
박 사장 가족 또한 불안정과 빈곤이라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구조적 모순에 무관하거나 침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박 사장은 칼에 찔리고, 다송이는 생일 날 다시 한 번 근세를 목격한다. 이에 충격을 받아 쓰러진다. 이처럼 프레카리아트아의 문제는 언젠가 선을 넘을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 계급이 손쉬운 해고를 통해 그들을 제어하려 하지만 그 불안과 불만이 그들과 상시 함께 하는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 또한 그들과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생충은 계층이 고착화 된 현실의 환부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사회와 개인에게 가져올 수 있는 ‘불안의 재난화’에 대한 영화라 할 수 있다.
<각주>
(1) 김미희,「[칸은 지금] 봉준호 감독에게 묻다. 영화 ‘기생충’ 일문일답」, MBC NEWS, 2019.05.23.,
http://imnews.imbc.com/news/2019/world/article/5326441_24712.html, 검색일 : 2019.11.14
(2) 핑크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에는 ‘아버지는 바다 너머로 떠나갔지(Daddy's flown across the ocean)’, ‘아버지, 도대체 무엇을 물려주었나요?(Daddy, what'd'ja leave behind for me?)’라는 가사가 나온다. 기우에게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한 채 지하실에 감금된 삶을 사는 기택의 모습과 유사하다. 또한 학력을 위조하는 장면과 ‘우린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We don't need no education)’는 가사와의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박사장 회사 이름은 핑크플로이드의 곡과 연관성을 염두에 두고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3) 물론 이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인간 관계를 상품화 한다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적인 비판이 가능하다.
(4) 얀 브레먼, 장호종. (2016). 프레카리아트는 허구적 개념 아닐까. 마르크스21, pp.96~97
(5) 얀 브레먼, 장호종, 위의 논문, p.96~97
(6) 토마스 타이슨 저, 윤동구 옮김,『비평이론의 모든 것』, 앨피, 2012, p.82
(7)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민음사, 2018, p.17 참고
(8) 장강명, 위의 책, p.429
(9) 토마스 타이슨 저, 윤동구 옮김,『비평이론의 모든 것』, 앨피, 2012, pp.135~36
(10) 이 글에서 사용하는 ‘기택의 가족‘이라는 표현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라고 볼 수 있다. 기택, 충숙, 기우, 기정 중 남성 어른인 ‘기택’의 이름만을 선택적으로 호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11) 한병철, 『타자의 추방』, 문학과지성사, 2017, p.129
<참고문헌>
1. 봉준호,「기생충」, 2019
2. 이상우, 이기한, 김순식, 『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 2002, 집문당
3. 토마스 타이슨 저, 윤동구 옮김,『비평이론의 모든 것』, 앨피, 2012
4. 가이 스탠딩 저, 김태호 옮김,『프레카리아트-새로운 위험한 계급』, 박종철출판사, 2014
5.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심철민 옮김, 『공산당선언』, 도서출판b, 2018
6.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이진우 옮김, 『공산당선언』, 책세상문고, [E-book]
7.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민음사, 2018
8. 얀 브레먼, 장호종,「프레카리아트는 허구적 개념 아닐까」,마르크스21, 2016
9. 이다운, 「영화 기생충 연구」, 어문연구, 101, 2019
10. 키어런 앨런, 김준효, 차승일,「프레카리아트 새로운 계급인가 허구적 개념인가」, 마르크스21, 2014
11. 김혜진, 「차별과 배제를 ‘공정성’이라고 말하는 사회」, 황해문화, 2018, p.233-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