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정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광호 Feb 19. 2021

나를 꺼내 줄 사람 어디 없나요

제시 배링,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더퀘스트, 2021

* 본 글은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자살과 관련된 책이기에 트리거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나를 꺼내 줄 사람 어디 없나요

제시 배링 지음, 공경희 옮김,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더퀘스트, 2021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내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모든 순간에 함께 했다. 그렇다고 그게 구체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완벽과 높은 기준을 강요했기에 삶의 모든 부분을 실패로만 느껴졌다. 반복되는 좌절은 무력감으로 이어졌고, 소중한 존재들을 연속해서 잃고, 내가 그들에게 상처 주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살아있는 게 죄악으로 느껴졌다. 죽어야겠다는 결심이 아주 강력하고, 구체적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동시에 내가 죽으면 남겨진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까. 그 생각에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검증하기 시작했다. 죽고 싶은 마음과, 죽어선 안 된다는 마음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건지 말이다.


  "목을 베면서 동시에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상태가 전형적인 자살 상태이며, 행위의 양면 모두 진짜다" p.102


(중략) 자살하려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살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상황에서만 살고 싶지 않을 뿐이다. p.103


  위의 두 문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죽고 싶었던 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는 건 다른 형태의 삶을 살고 싶다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삶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처럼 멀리 있고, 내가 생각하던 나와 실제의 나는 너무나 달랐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였고, 그걸 모른 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 시절과 내가 준 상처들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큰 좌절감을 불러왔다. 모든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았고, 그 비난은 타당해 보였다. 동시에 나의 잘못을 현실 속에서 감당하지 못해 죽어버리는 건 타당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감정을 검증해보기로 했다.


  정신과에 가서 약을 먹고, 가족에게 우울증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자살과 우울증에 관련된 책을 미친 듯이 읽었다. 내 감정을 파악하기 위해 감정일기를 쓰고, 억지로라도 산책을 하고, 밥을 챙겨 먹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죽고 싶다는 생각은 현 상황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면 죽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로 돌아가 나의 잘못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 사회가 조금 더 세심하고 배려심 있는 사회라면, 우리 가족이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적절히 표현하고,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변화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죽지 않을 것이었다. 근데 그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신념이 나를 죽음으로 자꾸 몰고 갔다. 해도 안 변할 거야. 거 봐 안 돼잖아. 끝없는 반추와 자기 비난은 극심한 에너지 소모를 일으켰고, 자꾸만 잠을 자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했다. 우울증 환자가 일어나는 걸 힘들어하는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에너지가 없어서다. 생각을 하느라 잠도 못 잔다.


  누군가 나의 이런 감정을 알아주길 바랬던 거 같다. 옷도 검은 옷만 입었다. 자살과 관련된 콘텐츠에 집착했다. 술을 미친 듯이 마셨다. 내가 너무 힘들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손 내밀어주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동시에 내가 너무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어 그 사람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가까이 오려는 사람을 밀어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감정상태였고, 나를 도와주려 했던 사람들은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멀어지는 나의 태도에 지쳐 손을 거두었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마저 힘들게 할 수 없었으니. 


  죽고 싶다는 생각 속에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변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분명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솔직하게 생각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관계들을 재설정했다. 내 삶도 조금씩 바꾸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과 꼬리를 무는 자기혐오, 우울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나 강렬하고 명확했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는 내 감정을 객관화하려 애썼다. 그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러면서 동시에 내 감정에 충실하려 했다. 그래. 내가 힘들만한 삶을 살아서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 그건 당연한 거잖아. 인정했다.


  정말 아주 조금, 아주 짧은 찰나에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들었다.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양말을 개서 넣어볼까. 옷을 정리해볼까. 책상을 닦아 볼까. 그런 것부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감는 것에만 몇 시간이 걸렸던 날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물론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올라왔던 에너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자기혐오와 비난, 자살 사고가 올라왔다. 나에게 핵심 문제는 경제력과 술이었다. 아버지가 술만 마시면 우울하고 화가 났다. 돈을 벌어서 독립해야 하는데 변변찮은 일자리도 못 구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계속 안 된다. 할 수 없다. 형편없다. 쓸모없다. 라며 허우적댔다. 겉으로 보기에 일상생활을 잘하는 것 같지만 그 일상을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료는 나 자신이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여전히 힘들지만 지금은 약도 끊고, 이전과는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 고민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나도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다. 그게 가능했던 건 우울과 자살을 이해하려 시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심각한 우울과 자살사고에 빠진 사람이 이걸 읽을 수 있는 에너지조차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책을 단 한 페이지 넘기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나의 증상을 알게 됨으로써 그 감정이 사실 '살고 싶다'는 것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내 감정을 나도 잘 모른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겠지만 나는 머리로 이해하고 난 뒤에야 가슴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타입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면 감정이 따라가지 못한다. 완벽주의와 사회불안 때문에 감정을 격리시키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동기가 무엇이든 자살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고 본다. 자살할 힘으로 살아가지 따위의 말이 왜 편견인지, 그런 편견이 자살 사고를 더 강화하게 되는지 이해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혹시 뭔가 하고 싶은 날이 온다면 꼭 나의 상황을 드러내고 도움을 청해 보길 권한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하기 힘들다면 지역 정신건강센터나 전문의에게라도 말이다. 나를 여기서 꺼내 달라는 외침을 알아줄 사람이 어딘가에는 있다. 그걸 직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겠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도 분명 있다. 물론 상황이 그대로면 우울증과 자살사고는 관리될 뿐이지 사라지지 않는다고 본다. 그럼에도 내가 인지하는 세상이 달라지면 세상도 나에게 다른 걸 내놓기도 한다. 또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작은 성공을 경험했을 때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싹을 조심히 소중히 다루어 나의 텃밭을 조금씩 가꾸어 가야 한다. 어제 키운 싹이 죽어도 다시 하나 심고. 며칠이 지나서 간신히 하나 심었어도 소중히 다루어주고. 그 텃밭을 채우고 고개를 들어보면 나의 인지가 왜곡되어 있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투혼과 기적 없는 일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