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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영 Jun 12. 2019

지극히 味적인 시장

충남 서천 오일장

판교(板橋). 판자 다리가 놓여 있던 것에서 유래한 동네 이름이다. 판교 하면 수도권 사람들은 성남시 판교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번엔 충남 서천군 판교면이다. 최근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고 유명해진 곳이다. 몇백m 안되는 거리 곳곳에 남아 있는 옛날식 건물들을 보러 관광객이 몰리지만, 필자에게 판교는 맛있는 도토리묵이 나는 동네다. 1990년대 후반 즈음 ‘판교 도토리묵’을 처음 봤을 때 성남 판교에서 도토리묵이 나오나 싶었다. 알고 보니 서천 판교였다. 판교 주변 산에 상수리나무가 많아 겨울마다 마을에서 도토리묵을 만들었다고 한다. 판교 묵은 오래전부터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동네를 찬찬히 돌다 보면 갈림길의 이정표도 집집마다 걸린 문패도 전부 도토리 색이다. 그런데 정작 판교에서 도토리묵 먹을 곳은 마땅치 않다. 예전 기차역이 있던 자리에 특화 음식점들이 있는데 묵을 따로 파는 곳이 없다. 식당 한 곳은 메뉴판에 도토리묵이라고 써놨지만 유명무실. 서울부터 판교의 묵사발을 염두에 두고 출발한 터라 난감했다. 겨우 농협 마트에서 판교 도토리묵의 생존만 확인했다. 콩국수, 냉면, 오래된 중국집 등을 찾는 이들만 많았다. 아무도 이곳이 도토리묵으로 유명한지 모르는 듯했다. 도토리묵은 가을부터 이른 봄까지가 가장 맛있다. 도토리를 수확해 전분으로 만든 뒤 시간이 지나면 특유의 쓴맛이 여려진다. 도토리묵 맛을 보지 못했는데도 입맛이 썼다. 쓴 입맛을 다시며 서천 오일장으로 향했다.


요즘 오일장만 찾으면 비가 주르륵주르륵 내린다. 제주, 경남 고성, 강원 양양·고성, 전남 구례·완도·해남 등 최근 10번 취재 중 7번이 비와 함께였다. 서천 가는 길, 하늘이 회색빛으로 시나브로 변했다. 장항 바다 너머로 해가 떨어질 무렵 결국 빗방울도 떨어지더니 다음날까지 계속 비가 내렸다. 모내기 철에 내리는 비야 반가운 존재지만 문득 출장길에 비를 몰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농번기에 비까지 내리니 오일장이 썰렁했다. 서천 오일장은 끝자리에 2·7이 들어간 날에 열린다. 상설시장인 서천특화시장 주차장과 그 주변에 열린다. 다른 지역은 상설시장이 오일장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오일장이 열리면 상설시장에 손님이 없거나, 아예 오일장만 점포를 열기도 한다. 서천특화시장은 300개 내외의 점포가 매일 문을 연다. 가장 큰 수산동과 농산물동, 그리고 잡화와 가공품을 파는 동까지 세 개로 구성돼 있다. 굳이 오일장이 아니더라도 장보기에 불편함이 없다.

수산동의 1층은 장터, 2층은 식당이다. 갑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터라 바닥 곳곳이 먹물로 검게 물들어 있다. 살아 있으면 크기에 따라 한 마리당 2만~3만원, 삶을 다하면 가격은 반값으로 떨어진다. 회로 먹을 것이 아니면 굳이 살아 있는 것을 살 필요는 없다. 개인마다 입맛은 다르겠지만 갑오징어는 살짝 데친 것이 가장 맛있다. 익으면서 살의 단맛이 도드라진다. 내장을 빼지 않고 통으로 찐 것은 갑오징어 요리 중에서도 ‘갑’이다. 녹진한 내장의 맛 때문에 안 먹은 사람은 많아도 한 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을 정도다. 서천 장항에서는 6월 초 ‘꼴갑 축제’가 열린다. 꼴뚜기와 갑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시기에 맞춰 축제를 여는 것이다. 전북 부안의 격포 해수욕장 근처는 갑오징어 불고기를 내는 곳이 많은데 서천은 갑오징어 볶음이 많다. 매운 양념으로 볶아 낸 갑오징어도 맛있지만, 주꾸미와 삼겹살을 같이 먹는 것처럼 주꾸미 대신 갑오징어를 넣으면 사실 더 어울린다. 주꾸미는 오래 볶으면 질겨서 빨리 먹어야 하지만 갑오징어는 오래 볶아도 질겨지지 않는다. 고기 익을 때까지 기다려서 고기와 같이 먹을 수 있다. 갑오징어와 삼겹살은 사주를 안 봐도 백년해로할 궁합이다. 갑오징어는 시장에서 생물로 몇 마리 구매할 수 있고, 서천수협 매장에 가면 급랭한 것을 살 수 있다. 오래 두고 먹을 요량이면 급랭한 것이 좋다.

수산물동에서 구매해야 할 것이 있다. 서천 인근 대천이나 보령은 조미김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물김 생산은 서천을 못 따라온다. 서천은 전국 김 생산량의 15%가량을 차지한다. 적은 양이 아닌데 정작 서천김을 아는 이는 드물다. 돌김에 파래 섞은 것은 반찬 없을 때 빛을 발한다.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조금, 식초 한 방울로 양념간장을 만들고 대파나 매운 고추를 다져 넣으면 금상첨화다. 김을 앞뒤로 살랑살랑 흔들며 두세 번 굽고 나서 먹기 쉽게 자르면 반찬 준비 끝이다. 밥상이 휑하다 싶으면 김치 한 종지 꺼내면 밥 두 공기 ‘순삭’이다.

서해 갯벌이 주는 선물이 많지만 으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하면 섭섭할 것이 바로 생합이다. 백합이 본래 이름이지만 서천에서는 생합이라 부른다. 새만금이 완공되기 전 부안, 김제 일대에서 많이 났지만 근래에는 예전보다 보기 힘들어 중국산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몇 개만 넣고 탕을 끓여도 바지락이나 동죽 한 바구니 넣고 끓인 것보다 국물이 시원하다. 포일에 싸서 찌거나 구우면 조개에서 우러난 감칠맛 나는 육수와 조갯살을 맛볼 수 있다. 생합 안주는 술을 부르고 다음날 해장까지 책임진다. 병 주고 약 준다.

특화시장 한편에 작은 국수 공장이 있다. 인천에서 국수 공장을 운영하다가 장소를 옮겨 서천에서 국수를 만드는 곳이다. 선풍기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면을 보고 있는데 비마저 내리니 따듯한 국물이 생각났다. 오일장 구경한다고 한 바퀴 돌면서 눈여겨본 국숫집이 생각났다. 멸치와 밴댕이로 낸 육수 한 모금 마시면 좋을 듯싶었다. 

‘동네작은식당’이라는 이름도 정겹다. 국수 한 그릇 청하니 시금치와 무짠지가 고명으로 올려진 따듯한 국수가 나왔다. 직접 담갔다는 빨간 열무김치가 유혹했지만 국물부터 찬찬히 마셨다. 국수를 한 젓가락 집어삼키고 열무김치를 씹으니 간이 딱 맞아떨어졌다. 국물 한 모금까지 더했다. 바닥이 보일 때까지 무한 반복. 국수 내는 곳이 많지만 맛있는 곳이 드물다. 4000원을 내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충남 서천과 전북 군산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금강 하구언이 한동안 유일하게 두 곳을 연결해 주었지만 동백대교 개통으로 조금 더 가까워졌다. 군산의 대표 특산물이 황금박대다. 박대를 건조하면 황금빛이 돈다고 해서 황금박대다. 박대라는 것이 전남 여수에서 선어로 먹는 서대와 비슷한 모양새다. 가자밋과 생선답게 납작한 모양새가 젓가락질할 것도 없어 보인다. 꼬리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젓가락으로 그나마 두툼한 머리와 몸통 사이의 살을 집어먹고 나면 다른 반찬이 눈에 안 들어온다. 젓가락으로 살을 뗄 수 없는 꼬리 부분은 통째로 씹어 먹으면 비로소 한 마리가 사라진다. 두 마리째 먹으면 밥이 모자라기에 한 마리 남은 박대를 먹기 위해 공깃밥을 추가한다. 구이도 좋지만 찜도 그에 못지않다. 특화시장이나 시장 주변에서 말린 박대를 살 수 있고, 주변 식당에서도 어렵지 않게 맛볼 수 있다. 서천 풍천장어타운(041-953-0073)

온종일 비가 내리고는 하늘이 개었다. 시간을 보니 얼추 저녁때다. 홍원항 근처 부사방조제까지 갈 생각으로 해안도로로 해서 북쪽으로 올라갔다. 작은 포구 하나를 지날 때마다 서쪽 하늘의 붉은빛 채도가 올라갔다. 선도리 갯벌체험 마을에 잠시 들렀다가 아예 자리를 잡았다. 수족관 가득 채워진 밀조개 유혹에 빠졌다. 서천에서는 밀조개, 부산에서는 명지, 명주조개로 불리는 개량조개다. 개량조개가 있다면 그 집 주인장이 요리를 못해도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개량조개로 끓인 칼국수를 주문하니 크게 자른 통김치가 같이 나왔다. 한소끔 끓인 것이라 조갯살이 질겨질까 봐 서둘러 먼저 먹었다. 조갯살을 씹으면 품고 있던 짠맛을 먼저 맛보여주고는 미안한지 감칠맛을 바로 보여준다. 씹는 맛에 대해 개량조개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조개는 그때그때 바뀐다고 한다. 비 맞고 다닌 이틀의 보상이 개량조개 칼국수라면 괜찮다. 덤으로 아름다운 낙조까지 봤으니 그러면 된 거다 싶었다. 일번지 칼국수(041-952-2469)

서해로의 여행은 동해와 달리 해가 떨어지는 저녁 풍경을 항상 기대한다. 운이 정말 좋은 날에는 해와 바다가 만나는 순간을 볼 수도 있지만 항상 구름이 훼방 놓는다. 훼방 놓는 구름도 가끔은 해넘이를 아름답게 만든다. 비가 온 뒤 미세먼지마저 사라진 파란 하늘이 붉게 물들 때 먹구름은 붉은빛의 운치를 더한다. 저녁 무렵 서울로 향하는 길은 잘 뚫린 고속도로보다는 해안가를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이 제격이다. 해가 길어지는 초여름이라면 작은 포구에서 저녁 먹고 나면 석양 질 때를 맞출 수 있다. 덤으로 맛있는 식당까지 만난다면 여행의 끝이 더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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