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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영 Jun 13. 2020

지극히 미적인 시장_32

고창 오일장

5월이 끝나가는 무렵 덜 익어 파란빛 도는 복분자를 보러 전라북도 고창을 찾았다. 고창의 복분자는 유명하다. 어느 날 요강을 뒤집는 신화를 등에 업고 나타나 건강식품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붉은색으로 익는 산딸기와 달리 복분자는 파랗던 것이 붉게 물들고 검은빛을 띠면 다 익은 것이다. 복분자가 익을수록 요강 뒤집는 힘은 사라진다고 한다. 한방에서도 파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물드는 것을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복분자의 복은 뒤집을 복(覆), 분은 동이 분(盆)이다. 동이는 그릇이나 사발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사발을 뒤집어 놓은 모양새를 보고 복분자라고 했다. 누군가가 사발을 요강으로 바꿨을 뿐이다. 복분자는 나무딸기의 일종으로 다량의 안토시아닌을 함유하고 있다. 딸기는 크게 덩굴딸기와 나무딸기로 나눈다. 덩굴딸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통통하고 달곰한 빨간 모양의 딸기다. 나무딸기는 블루베리, 라즈베리, 복분자 등이다. 익은 복분자의 알갱이는 순두부처럼 부드럽다. 손끝에 힘을 빼고 살짝 집어도 검게 물들 정도다. 복분자를 흐르는 물에 살짝 씻어 먹거나 그냥 먹는 까닭이다. 산딸기는 딸기처럼 달곰한 맛은 적지만 은은한 단맛에 특유의 향이 매력이다. 요강 뒤집는다는 것은 말 잘하는 이가 만들어낸 이야기. 그래도 복분자가 가진 에너지라면 충분히 생활에 활력을 줄 수 있다.

복분자 농장으로 가기 전 고창 읍내에 들러 장터 구경을 했다. 고창 오일장은 3과 8이 들어간 날에 열린다. 오일장은 고창 읍내를 가로지르는 고창천 위 신흥교부터 전통시장 입구까지 200m에 선다. 전통시장 안에서도 상설 가게 외에 오일장이 설 때만 문을 여는 가게까지 가세해 제법 흥정이 오가는 모습이다. 5월과 6월 사이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시점인지라 구경거리가 적었다. 고창은 풍천, 바다와 민물이 만나는 곳에서 나는 장어 또한 유명하다. 고창을 지나 서해로 흘러가는 인천강이 있어 제대로 된 풍천 장어를 만날 수 있는 고장이다. 고창을 대표하는 작물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수박이다. 고창의 산은 높지가 않다. 예전에 산지를 개간해 콩 농사를 하려다 수박으로 바꿨다고 한다. 콩 대신 수박이었지만 아침저녁으로 산과 바다에서 부는 서늘한 바람 덕에 당도 높은 수박을 생산했다. 최근에는 익숙한 줄무늬 수박 대신 작은 애플수박이나 겉이 검고 속이 노란 블랙망고수박 등 다양한 수박을 생산하고 있다. 맛있는 수박을 고르는 요령이 있다. 적당히 꼭지가 마른 것이 당도가 좋다. 꼭지가 없어도 상관없다. 수박은 수확하고 며칠 지나야 맛이 드는 후숙 과일이다. 수박의 수분 함량은 대략 94%. 수박을 보관하면서 수분이 증발하는 만큼 당도가 올라간다. 수박은 싱싱할수록 단맛이 떨어진다. 싱싱해서 좋은 것은 채소 정도일 뿐, 싱싱하다고 해서 꼭 맛까지 있는 것은 아니다.

얼추 6월 중순이면 복분자, 다양한 수박이 시장에 지천일 터인데 5월 말이어서 시장에서 볼 수가 없었다. 대신 완두콩과 열무가 지천이었다. 완두콩은 작년 가을 혹은 올 초봄에 씨 뿌려 재배한 것이다. 완두콩을 넝쿨째 가져온 아주머니 두 분의 손이 재빨랐다. 완두콩 까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구경하며 잠시 서 있으니 필자 옆으로 한두 사람이 붙는다. 이내 흘러가던 사람들 사이에서 멈춤이 생겼다. 누군가가 무엇을 보고 있으면 궁금함에 발길을 멈춘다. 사람이 모이면 흥정이 시작되고 돈과 물건이 몇 번 오가면 이내 사람들은 흩어진다. 한갓진 곳에서 시장을 바라보면 이런 모습을 종종 본다. 참견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시장 구경이 재미있다. 필자도 덩달아 완두콩 한 봉지 사 들고 시장을 떠났다.

고창 하면 선운사 주변의 식당가에서 장어를 먹어야겠지만 민물 장어도 나름의 제철이 있는 법, 수온이 적어도 28도 정도 되는 한여름이 돼야 제철이다. 장어 대신 선택한 것은 병어였다. 고창으로 향하면서 장어는 몰라도 병어는 먹어야지 생각했다. 따듯해지는 바다에서 맛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 병어. 고창의 위는 부안, 아래는 영광으로 맛있는 수산물이 나는 칠산 바다를 공유하고 있다. 병어회와 병어찜, 둘 중의 선택은 병어찜이었다. 햇살이 날카로워질수록 얼큰한 국물과 고소한 병어살의 조합은 극강이 된다. 사실 뼈째 먹는 회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더워지면 얼큰한 것만큼 떨어진 입맛 살리는 묘약은 없다. 


시장통을 나와 시내를 지나 조용한 마을로 들어섰다. 점심시간 전에 가야 혼자 먹기 편하기에 조금 서둘렀다. 병어찜 작은 것을 주문하니 이내 상이 차려지고 오늘의 주인공 병어가 나왔다. 냄비 가득 담긴 병어 한 마리. 병어찜 주변으로 차려지는 반찬을 마다했다. 병어 크기로 봐서는 반찬까지 손이 안 갈 듯싶었다. 괜히 차렸다가 버리면 아까워서 가능하면 반찬은 김치 하나만 두려고 한다. 얼추 국물이 자작자작 끓었을 때 병어를 크게 떠서 국물에 적셨다가 먹었다. 생선찜이라는 게 오래 끓여도 국물이 속살까지 들어갈 수 없는 법. 국물과 함께 먹는 게 최선의, 최고의 방법이다. 한여름이 오기 전 병어 살맛은 땅콩을 갈아 넣은 듯 고소했다. 다은회관(063-564-3304)

고창의 5월은 보리가 익는 계절. 푸르던 보리 빛이 따스한 햇볕 아래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코로나19만 아니라면 보리축제에 이어 6월에 복분자와 수박 축제가 열렸겠지만 모든 곳이 다음으로 미뤄졌다. 잠깐 머물렀다 가는 봄처럼 관광객들도 잠시 보리밭에 머물다 떠난다.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을 뒤로하고 상하면의 유기농 농원으로 향했다. 

상하농원은 2016년 정식 개장한 곳으로 숙박과 음식, 체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곳이다. 햄 공방이나 치즈 등 지역의 축산물을 활용하는 공방도 있어 볼거리가 다양하다. 오늘은 햄과 치즈로 만든 피자를 먹으러 농원을 찾았다. 지역에서 생산한 농축산물이 피자 한 판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역 특산물을 꼭 거창하게 한 상 차려 놓고 먹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공고하기에 딱 맞는 메뉴이기도 했다. 다양한 피자 중에서 치즈와 햄 공방 소시지가 반반씩 있는 피자를 골랐다. 잘 숙성한 도로 구운 피자는 토핑이 없어도 그 자체로 맛이 있다. 치즈나 토핑이 있으면 맛이 몇 곱절 상승한다. 여기 피자가 딱 그런 피자였다. 도는 부드럽거니와 고소하기까기 했다. 치즈와 소시지의 짠맛이 고소함과 만나니 저절로 손이 갔다. 출장 다니며 찌개나 탕만 먹다가 처음으로 혼자 피자를 먹은 듯싶었다. 농원 입장료가 있지만 오후 5시 이후로는 무료라고 한다. 레스토랑은 주말 제외하고는 사정에 따라 문 닫는 시간이 달라진다고 한다. 방문하기 전 영업 문의는 필수다. 상하농원(1522-3698)

상하농원을 나와 구시포 해변으로 길을 잡았다. 구시포에서 동호 해수욕장까지의 해안도로가 한적하고 위도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가 아름답다. 저녁 무렵, 고속도로 휴게소보다는 해수욕장 근처에서 저녁을 먹기로 작정하고 주변을 보니 백합죽 전문점이 보였다. 식당 메뉴판을 보니 백합만 한다. 이런 곳은 다른 곳보다 실패할 확률이 낮다. 기온이 올라가면 서리 내릴 즈음을 기약해야 하는 것이 조개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에서 나는 백합은 더더욱 그렇다. 부안을 비롯해 김제는 예전에 백합의 주산지였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바다로 흘러들던 곳이었기에 양도 많고 품질도 좋았다. 새만금이 들어서면서 백합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반면에 고창은 인천강이 바다와 만나기에 여전히 맛 좋은 백합이 나고 있다. 들어가서 죽을 주문하려고 하니 2인분 이상. 낙담하지 않고 2인분은 포장이고 한 그릇만 먹고 가겠다고 했다. 며칠 전 수술하신 장모님도 드리고 나도 먹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 나온 백합죽은 예상대로였다. 전문점답게, 백합죽답게 시원하고 고소하게 잘 끓여냈다. 잘 익은 김치가 옆에서 거드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낮에 느낌대로 들어갔다가 실패한 장어 메뉴의 억울함이 한방에 풀렸다. 식사를 마치고 “가을에 다시 올게요” 하니 할머니께서 웃으며 답하셨다. “그려 이제 좀 심심해지지.” 해성식당(063-562-3652)

7월, 포도가 익을 무렵에 다시 고창에 갈 생각이다. 복분자 보러 간 농원 한편에 포도나무가 있었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 포도 4500송이가 열린다고 한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991.7㎡(300평)이기에 가능한 수확량이다.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간 모습도 멋지거니와 포도의 맛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7월이면 장어 먹기 딱 좋은 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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