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추천작 #다큐추천작
머나먼 옛날.
내가 대학생일 때는 페이스북에 가입하려면 .edu로 끝나는 대학교 이메일 검증이 필수였다. 페북 친구수는 인싸의 척도였고 페북 프로필의 relationship status는 썸인지 사귀는 건지 헤어진 건지를 공표하는 관문이었다. 시대의 파도에 휩쓸려 열심히 페북을 하다가 졸업하고는 열정이 시들어 뿔뿔이 흩어진 가족과 친구들의 생사확인을 위해 종종 사용했던 도구였다.
사회인이 되고 대학부터 사귀었던 남친과 헤어진 후, 어느 무료함과 그리움에 이끌려 페북을 다시 끄적였다. 대학 친구들의 포스트에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한창 누르던 어느 날, 전남친에게서 페북 메시지가 왔다. 어느 순간부터 페북 피드에서 내 이름이 자주 보여 힘들다고. 미안하지만 페북 '친구 취소'를 해야 할 것 같으니 이해해달라고.
"우리 대학 친구들과 다 친구 취소하지 않는 이상은 소용없을 텐데"라고 나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그 역시 어느 무료함과 그리움에 이끌렸으리라. 내가 포스팅을 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 포스트에 반응만 했었기에 큰 차이는 없을 거라 예상한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당시 페북 알고리즘을 조금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쩌면 그를 위해, 나는 페북과 또 멀어졌다.
There are only two industries that call their customers “users”: illegal drugs and software.
고객을 '유저/사용자'라고 부르는 건 마약과 소프트웨어 업계밖에 없다는 섬뜩한 말. 사실 확장시키려면 '맥북 유저'등 하드웨어와 여러 분야에도 적용을 시킬 수는 있겠지만 의례적으로 판매자/제공자의 반대편엔 구매자/고객이
있기 마련이기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어감상 '유저'라는 말이 무임승차한 느낌인데 마약은 돈, 건강, 안전을 담보로 SNS는 데이터와 안전을 담보로 한다는 것이 모순적이다. 더불어 나의 생활 반경과 이상/생각까지도 기업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스노든). 둘의 공통점은 중독성으로 인한 의존성, 의존성으로 인한 삶의 변화. Use (사용)와 Abuse (남용/오용)은 정말 한 끗 차이인데 여기서도 적용되는 듯하다.
Nothing vast enters the life of mortals without a curse.
우리 삶에 들어오는 막대한 (좋은... 좋아 보이는?) 것들은 저주와 함께 온다는 것은 결국 남용/오용에 문제가 아닐까? 충분히 소통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에 의해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소셜 플랫폼의 저주인 것 같다. 돈이 수단이고 목적인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저주. 자본주의 세상에서 소셜 플랫폼을 남용하며 일어나는 재난을 담은 영화 #돈룩업와 달리 <소셜 딜레마>에서는 군더더기 없는 구성과 밀도 높은 인터뷰들, 그리고 적절하게 어우러지는 가상 재연들이 스릴 있게 펼쳐진다. 훌륭한 연출과 구성과 더불어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결론. 영화는 단순히 '얘네가 우리 정보를 이렇게 사용하고 있고 우리는 반응 동물이 되어가고 있다고!!'라고 외치는 영화가 아니라 당장 소소하게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점들과 방향성을 제시해준다.
If you’re not paying for the product, then you are the product
모든 변화의 첫걸음은 '인지'라던가. 모든 영리 기업들의 당연한 목표는 '돈'이고 우리가 그들의 제품/서비스에 마땅한 값 지불을 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그들의 제품이 되어야 한다. 참고로 페북은 이 말에 '우리는 우리 유저를 절대 상품화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하며 이런 영화를 출시한 넷플을 공격하는 보도를 낸 적이 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한 번쯤은 SNS의 의존도를 낮춰보며 나의 삶을 환기시키는 것도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실천사항들을 제시한다.
- 알림 설정 끄기
- 스크린 타임 통제
- 추적을 최소화한 덕덕고와 같은 브라우저 이용
- 어플 지우기
- 관련 정책 마련에 관심을 같고 함께 힘쓰기 (다큐 웹사이트에서도 가능)
우리는 언제부터 많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랑하고 칭찬받고 위로받고 싶은, 인정받고 싶은 니즈가 있었을까?
앞으로는 모르는 다수가 아닌 주변의 소수에게 나부터 관심을 주고 또 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인성과 실력을 더 가꾸어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