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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Jan 31. 2016

파리의 건축들

불온한 상상력이 이루어낸 혁명적인 건축들

부모님이 잠드신 시간에 몰래 일어나 책장 속에 소중히 끼워두었던 ‘베르사유의 장미’를 꺼내 보던 어린 시절. 

기구한 운명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며 마음을 졸이고, 남장 여자인 오스칼의 활약에 설레기도 하며, 강력한 왕권 중심의 계급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이 이기기를 응원하였다.  프랑스혁명을 배경으로 한 이 만화책 때문에 그 시절 나에게 파리는 혁명의 도시로 각인되었다. 베르사유의 장미를 애독하던 내가 대학생이 되어 건축을 공부하면서 파리는 다시 혁명이라는 코드로 다가왔다.


혁명(革命)은 이전의 관습이나 제도, 방식 따위를 단번에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급격하게 세우는 일이다. 기존의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일은 언제나 저항에 부딪히고, 때로는 처참하게 깨져서 피가 흐른다. 그러므로 거대한 현실의 벽에 갇히지 않고 벽 너머의 세상 속으로 나아가고자 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이들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내게 혁명비적인 파리의 건축물과 이를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재료의 혁명: 에펠탑

에펠탑 @ Google Image


에펠탑이 없는 파리? 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은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만국 박람회 조형물로 건설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독창적인 걸작이 될 만한 탑을 만들기 위해 설계안을 공모했고,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키며 700여 응모작이 접수되었으나 만장일치로 교량기술자 구스타프 에펠 (Gustave Eiffel: 1832-1923)의 안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에펠의 설계 안은 4개의 철각으로 조립된 윗부분에 탑을 얹어 놓는 구조였으므로, 각각의 철각을 지탱하기 위해 대량의 콘크리트로 기초를 다졌다. 탑의 본체에 사용된 연철의 물량은 무려 7,000톤 이상이었으며, 사용된 큰 들보와 철판이 1만 3,038개, 리벳은 105만 846개에 달했다. 에펠은 기중기를 이용해 이와 같은 대량의 자재를 불과 25개월 만에 조립하여 완성시켰고 한 치의 오차도, 한 건의 하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이런 완벽한 건설의 배경은 철저한 준비와 빈틈없는 계산, 치밀한 사전작업이 따랐다. 탑의 골조에만 1,700장 이상의 전체도를 만들고, 각 부속자재에 관해서도 3,629장의 전체도를 자세히 그려서 조립 작업을 정확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연결에 사용한 리벳의 구멍도 구멍과 구멍 사이의 간격을 1/10mm의 정밀도로 계산하고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가느다란 기둥이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솟아 올라갔고, 착공 2년 후인 1889년에 드디어 파리시의 한 복판에 '거대한 철탑'이 나타났다.
하늘을 찌를 듯한 철탑의 건설에 참여한 기술자들은 '거대한 기념 건조물에 의한 과학과 산업의  승리'라고 하였으나 소설가 모파상, 아베마리아의 작곡가 구노 등의 예술가들로부터 '추악한 철 덩어리', '천박한 이미지', 공장의 굴뚝같은 형태의 공업 기술을 예술 도시 파리에 끌어들인 졸작' 등의 비판을 받았다. 이후로도 ‘예술이냐  공업이냐’라는 격렬한 논쟁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20여 년이란 시간이 흐른 1910년. 에펠탑은 해체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처음 에펠탑을 건설한 회사가 그 장소를 빌려 쓰는 조건이 20년이었기 때문이다. 20년이라는 시한부 운명이었던 에펠탑을 구하기 위해 에펠탑 건설에 반대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해체 반대운동을 벌였다. 강산이 2번 변하는 동안 사람들은 에펠탑이 없는 파리의 하늘을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때마침 기술의 진보로 무선통신이 탄생하여 에펠탑을 구제하는데 일조했다. 에펠탑 정상에 무선 안테나가 설치되어 대서양을 넘나드는 전파들을 쏘아댈 수 있었으니 에펠탑을 함부로 헐어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후 에펠탑은 새로운 통신기술이 발명될 때마다 각종 첨단 장비로 무장하게 되었다. 1918년에는 라디오 방송을 위한 장치가 설치되었고 1957년에는 텔레비전 안테나가 설치되었으며 현재는 기상관측 장비와 항공운항 장비까지 가세되었다. 1985년부터는 야간 조명을 비추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되었다. 


에펠탑 @ Google Image



표현의 혁명: 파리의 지하철역 


파리를 걸어 다니다 보면 독특한 지하철 역을 볼 수가 있다. 아치, 손잡이와 조명기구, 안내판에 이르기까지 철의 가소성을 살린 곡선으로 식물의 잎이나 덩굴처럼 디자인된 아르누보 스타일의 역 말이다. 


파리 지하철역


아르누보(Art Nouveau)는 영국의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에 의해 전개된 '미술공예 운동' (Art & Crafts Movement)의 영향을 받아 기존의 예술을 거부하고 새로운 양식을 수립하려는 당시 미술계의 풍조를 배경으로 한 근대 예술 건축 운동이라 말할 수 있다. 또 세기말이라는 불안 요소를 이겨나가려는 인간의 주관적인 감성을 다룬 모던 휴머니즘 계열의 운동이라고도 한다. 

각 나라별로 아르누보 운동을 보면 영국에선 아르누보(Art Nouveau), 프랑스는 기마르 양식(Style  Guimard)이라고 하였고, 독일은 유겐트 스틸(Jugendstil), 이탈리아는 스틸레 리베르티(Stile Liverty)라는 각 나라별로 다른 이름을 같게 되었다. 그 이유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려는 공통 의식은 있었지만 민족과 지역적인 특성으로 인해 강조하는 방향이 조금씩 달라 서로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기마르 양식(Style Guimard)이라 부르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중심엔 헥토르 기마르(Hector Guimard, 1867-1942)가 있다. 프랑스 아르누보 건축의 대표적인 건축가로서 명성을 떨친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파리의 지하철 역 출입구(1904) 디자인이다. 기마르는 다른 아르누보 작가들처럼 덩굴풀과 담쟁이 등 식물을 연상케 하는 구불구불하고 유연한 곡선을 작품에 다양하게 활용했다. 아르누보 작품들의 화려하면서 기이한 느낌은 바로 이런 것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아르누보 작가들은 특히 철을 다양하게 사용했는데, 이 운동이 장식 주의의 한계를 가지면서도 중요한 근대 예술 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철'이라고 하는 새로운 재료로 새로운 표현의 영역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형태의 혁명: 퐁피두 센터


퐁피두 센터는 1969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던 조르주 퐁피두가 '새로운 시대의 등대' 로서 예술진흥과 사회교육을 위한 문화예술센터의 건립을 결정하며 구체화되었다. 1971년 국제설계경기를 통해 49개국의 681점의 설계 응모작 중 렌조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의 공동 설계작품이 당선되었다. 


퐁피두 센터 외관


당시 34세였던 이탈리아인 렌조 피아노와 38세의 영국인 리처드 로저스는 무명의 건축가였다. 그들을 세계적인 건축가로 발돋움하게 한 작품인 퐁피두 센터는 문화예술공간이지만 외관상 문화예술공간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다. 철과 유리로 구성된 차가운 이미지에 당연히 건물 내부에 있어야 할 각종 설비 덕트(duct: 건축물에서 공기나 기타 유체가 흐르도록 만들어 놓은 통로 및 구조물)나 배관들이 모두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기둥들은 물론 에스컬레이터까지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건축의 내부를 조직하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감싸는 건물의 외관이 있어야 한다는 오랜 건축 개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1977년 완공된 퐁피두 센터는 이렇게 파격적인 외관 때문에 에펠탑 건립 때만큼이나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내 마음에 아로새겨진 혁명비적인 파리의 건축물들. 기존의 상식을 깨고 새로움을 추구하려고 하였던 건축가들의 불온한 상상력이 고스란히 담긴 건축물들과 함께 한다면 파리가 왜 유행을 선도하는 예술의 도시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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