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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Jan 27. 2016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무대, 아레초

슬프고, 경이로우며 행복이 담긴 이야기를 품은 도시

여유롭게 늘어진 초가을 햇살과 함께 아레초행 기차를 탔다. 아레초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면서 꼭 가보리라 다짐했던 곳이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배우 로베르토 베니니가 각본과 연출, 주연을 겸하고 실제 아내인 니콜레타 브라스키가 그의 아내 역으로 출연한 영화는 담담한 독백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말하기엔 쉽지 않은 이야기죠.
동화처럼 슬프고, 경이로우며 행복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유대인 수용소의 참담한 일상을 감추기 위해 어린 아들에게 1등을 하면 탱크를 탈 수 있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속이는 아버지 귀도. 아들을 위해 유머러스한 모습으로 웃음을 터트리게 하고, 때로는 목숨을 건 대담함으로 부정(父情)의 위대함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죽음으로 가는 길 위에서 숨어있던 아들과 눈을 마주친 후, 윙크를 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걸어가던 장면에서는 봇물 터지듯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웃음이 슬픔으로 치환되고, 슬픔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역설적인 사실 앞에서 우는 것 외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두오모와 귀도  


기차 안에서 떠올리던 영화의 감동을 안고 아레초에 도착했다. 마을을 둘러싼 성벽을 따라 좁은 돌길을 산책하는데 시간이 멈춘 듯 적막하다. 느닷없이 나타나 나를 놀라게 하던 고양이를 제외하면 지나가는 행인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다음 날은 아레초에서 가장 큰 축제가 열리는 날인데 사실인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두오모

영화 촬영 장소들을 가보기 위해서 시내로 향한다. 유난히 언덕이 많은 토스카나 지방 남서부의 중심 도시인 아레초는 언덕 위에 위치해서 경사진 길이 많다. 거친 숨을 고르며 힘들게 오르막을 올라가니 금방 두오모가 보인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 방석을 우산 삼아 쓰고, 두오모 앞 계단에 빨간 융단을 깔고 내려가던 귀도와 도라의 모습을 떠올리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이 두오모에서 맹활약을 했던 또 다른 귀도도 떠오른다. 귀도 모나코. ‘아레초 출신의 귀도’라는 뜻으로 귀도 다렛초(Guido d’arezzo)라고도 불린다. 그는 ‘도- 레- 미- 파- 솔- 라- ’라는 음 이름을 처음으로 만든 수도승이다. 음악을 배우는 사람들이 음정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8세기부터 전해오던 <성 요한 찬가 Ut queant laxis>의 가사에 새로운 곡을 붙였다. 


Ut Queant laxis 

re sonare fibris 
Mi ra gestorum 
fa muli tuorum, 
Sol ve polluti 
la bii reatum 
Sancte Ioannnes. 


당신의 종들이 당신의 행위의 훌륭함을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도록

그들의 더럽혀진 입술에서 모든 죄악을 씻어주소서.

성 요한이여.


각 구절의 음은 차례대로 올라가는 순서대로 되어 있는데, 첫 음절을 따면 우트(Ut), 레(re), 미(Mi), 파(fa), 솔(Sol), 라(la)가 된다. 500년이 지난 후, 루도비코 자코니는 ‘성 요한이여’ (Sancte Ioannnes)의 첫 자인 S와 I를 합쳐 시(SI)를 만들어 추가했다. 17세기 초반엔 발음의 편의상 우트(Ut)를 대신해 하느님이란 뜻의 Do (Dominus)를 써서 오늘날의 음계가 완성되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처럼  꾸밈없이 소박한 두오모. 화려한 조각이나 대리석으로 치장하지 않은 모습이 더 경건해 보여 좋다. 하나 더 좋은 점은 두오모가 위치한 장소이다. 과거의 도시 계획자들은 도시를 설계할 때 두오모를 가장 핵심적인 장소에 배치한 후, 두오모를 중심으로 광장, 공공시설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곳은 푸른 산과 네모 반듯이 정리된 논과 밭, 아레초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공원 옆에 위치해 있다. 



넓은 공원 공터에서는 매달 첫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골동품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벗겨진 칠이 멋스러운 가구와 소품들.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사는 사람이 있을까 의문스러운 신문과 포스터들. 진귀해 보이는 주화들. 사고 싶었던 Olivetti사의 이동식 타자기인 Lettera 22 타자기와 출출한 배를 채워줄 간식거리를 파는 가게들까지. 정말 없는 것이 없다.



광장과 축제


부온 죠르노, 프린치페싸! (Buon giorno, principessa: 안녕하세요, 공주님!) 하며 경쾌한 억양으로 도라에게 인사하던 귀도를 떠올리며 그란데 광장(Piazza Grande)에 들어섰다. 마을 어귀와는 다르게 이 곳은 분주하다. 내일 열리는 죠스트라 델 사라치노(Giostra del saracino) 축제를 준비하느라 한창이다. 광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흙을 돋아 길을 만들고, 산타 마리아 델라 피에베 교회(Santa Maria della Pieve)와 바사리 로지아 (Loggia di Vasari: 로지아는 한쪽이 트인 회랑) 앞에는 관중석을 만들어 놓았다. 


죠스트라 델 사라치노 @ Google Image


죠스트라 델 사라치노는 말 위에서 창을 들고 하는 마상경기이다. 네 팀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차례로 창을 들고 달려가 사라센 인형이 들고 있는 점수판을 찌르고, 찌른 부위에 따른 점수 합계가 가장 높은 팀이 이긴다. 중세 시대에 군사 훈련의 목적으로 시작된 경기는 1931년부터 현대적으로 재현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목적은 바뀌었지만 선수들과 경기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복장은 예전 그대로이다. 역사와 전통의 가치를 잘 알고, 지켜내는 이탈리아인들 덕분에 타임슬립을 한 듯 중세시대를 만끽할 수 있었다. 



영원한 사랑으로 불멸의 작품을


광장 어귀에는 영화를 촬영한 장소에 대한 설명과 사진이 기재되어 있는 표지판을 보고 페트라르카 극장(Teatro Petrarca)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페트라르카 극장


페트라르카 극장은 시인이자 인문주의자였던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Francesco Petrarca, 1304.7.20 ~ 1374.7.19)의 이름을 따왔다. 1304년 아레초에서 태어난 그는 귀도가 도라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것처럼, 우연히 라우라를 보고, 불 같은 사랑에 빠져버린다. 라우라는 흑사병으로 죽을 때까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페트라르카는 그녀를 한결같이 사랑했고, 그 사랑 덕분에 유명한 작품이 탄생했다.


칸초니에레(Canzoniere)가 그 작품이다. 칸초니에레는 총 366편 가운데 30여 편을 제외한 대부분이 라우라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들을 엮은 시집이다. 각 시에는 제목이 없고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이제 나는 조금 더 살리라, 나의 삶에

단 한 번의 그대 눈길이 그토록 힘이 되기에.

내가 열정을 신뢰하지 않게 될 때,  그때 죽으리.


< 칸초니에레 47>,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표현한 근대적 감각. 그리고 고전에 대한 관심과 연구로 인해 그는 최초의 인문주의자로 평가된다. 


아레초의 역사는 고대 로마가 건국되기 이전에 중부 이탈리아에서 번성하던 에트루리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아레초. 이 곳에서는 음계를 창시한 귀도 다렛초, 초기 르네상스 시대를 연 페트라르카는 물론  ‘르네상스’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16세기 이탈리아 예술사가였던 조르지오 바사리(Giorgio Vasari)도 만날 수 있다. 바사리가 그의 저서 <위대한 예술가들의 생애: Vite dei piu eccellenti pittori, scultori ed  architetti>에서 ‘부활’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명사  '리나쉬멘토(Rinascimento)'를 쓴 이래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유럽의 문화현상을 지칭하는 명사로 정착되었다.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도시 아레초. 
그란데 광장을 신나게 질주하며 행복을 만끽하던 귀도와 그의 가족들을 닮은 이 곳에 다시 오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Arrivederci!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 Googl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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