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한 편지

애잔별곡

by 정단우





미숙한 편지



집에는 화장품이나 향수 냄새보단 샴푸나 로션 향이 배길 바랍니다.

냉장고에는 소주 대신 블랑 몇 캔 정도를 쟁여두고 싶구요.

TV에 EXO 나올 때는 소파에 걸터 앉아 입벌리고 집중해도 됩니다.

그 옆에서 나는 유튜브로 정유미 영상 좀 보면서 기다리면 되죠.

고양이가 나만 따른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내가 당신을 따르니 괜찮아요.

가끔 친구는 안만나냐고 물어보면 당신이랑 노는 게 제일 재밌다고 대답할거에요.

마트에서 장볼 때는 뜬금없는 상황극으로 서로를 웃겨주면 어떨까요.

카트는 내가 끌테니 두 손에 이것저것 들고와서 팅커벨처럼 재잘대도 좋아요.

밤에는 치킨 한 마리 시켜놓고 같이 하트시그널이나 보며 깔깔대는 게 행복 같구요.

자다가 방귀라도 뀌는 날엔 조심해야 할겁니다. 매번 발뺌해도 나는 다 듣거든요.

주말에는 가끔 스탄게츠의 보사노바 앨범을 깔고 브런치를 준비한 뒤 이불에 말려있는 당신을 깨우는 사람이고 싶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누구시죠?’하고 놀릴라치면 거울 한 번 슥 보고는 이정도면 민낯도 예쁘다며 입꼬리를 올린 채로 달려와 안겨주세요.

오전에는 헐렁한 차림에 반스를 구겨신고 집 근처 단골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는 것도 좋겠네요.

거울 앞에선 ‘오늘 뭐 입지’같은 시덥잖은 주제를 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다 동시에 빵터지는 취향이길 바라요.

운전은 내가 할테니 조수석에 앉아서 요기 가자, 조기 가자 말만 해주면 됩니다.

배도 안고프면서 엽떡을 그냥 못 지나치고 어리광 피워도 괜찮아요.

쇼핑할 생각에 들떠 발걸음이 총총거리면 뒤따르면서 사진이나 몇 장 찍어둘게요.

나는 폴로 매장만 잠시 들리면 됩니다. 내가 고른 스웨터가 예쁘다며 따라 집어도 좋습니다.

와인은 잘 몰라도 가끔은 레스토랑에서 잔을 부딪히며 장난끼 섞인 윙크를 날려주세요.

당신 앞에선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같은 해묵은 영화대사도 능청맞게 할 수 있어요.

집에 돌아와선 비틀비틀 양말을 벗으면서 오늘 참 행복했다며 싱글벙글 하겠지요.

매일 안고 자는 사이라도 오늘은 나를 유혹해주세요.

한참을 기다려온 것 처럼 단번에 넘어가버릴거에요.


그래요.

이게 다 당신 이야긴데 내가 참 멀리 와버렸네요.

이 캄캄한 터널을 다 지나고 다시 당신에게 간다면

그 때도 이 고백은 유효할까요.

그 때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날 바라볼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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