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계절의 결/책장의 결/마음의 결/시간의 결/인사의 결
내가 퇴근길의 수많은 선택지를 지나쳐 굳이 동네 초입의 LPG 충전소만 고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곳엔 환한 조명 아래, 한 편의 품위 있는 시(詩)처럼 후덕하게 자리를 지키시는 충전원 어르신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 경건한 풍경을 마주한 이후, 나에게 이곳은 단순한 충전소 그 이상의 의미가 되었다.
충전소를 비추는 차가운 불빛조차 어르신이 펼쳐 든 책장 위에서는 온기를 머금은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백발과 나비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떨리던 책장의 움직임, 그 찰나의 모습은 피곤한 퇴근길 위에서 마주친 가장 고요하고도 아름다운 풍경화였다.
가스 충전을 위해 안으로 들어서면 어르신은 읽고 있던 책을 갈무리하고 얼른 달려와 가스를 채워주셨다. 그리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며 다정한 배웅의 말을 얹어 주셨다.
어느샌가 나는 충전소에 들를 일이 없어도 차창 너머 그분의 자리를 살피곤 했다. 아름다운 예술 작품 앞에 서면 마음이 절로 순해지듯, 책에 침잠한 어르신의 실루엣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소음들이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매서운 겨울이 찾아오자 충전소의 풍경도 결을 달리했다. 차가운 날씨 탓에 공터에서 책을 읽던 어르신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찬 바람을 피해 사무실에서 손님이 없는 틈틈이 배반하지 않는 벗과의 소통을 하고 계실 어르신의 모습이 그려졌다.
한편, 몸을 잔뜩 움츠러들게 하는 추위가 깊어질수록 차가 들어설 때마다 달려 나오시는 어르신의 인사는 외려 더 길고 정겨워졌다. 바깥 온도가 낮아질수록 어르신의 말씀에는 더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고, 예전보다 더 다정한 수식어들이 마치 겨울꽃처럼 풍성하게 보태졌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십시오."
"가시는 길 조심하시고, 오늘 하루도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도로가 온통 미끄럼틀입니다. 거북이 안정 운행입니다. 고맙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어르신의 다정한 말씀은 차가운 마음을 녹이는 덕담 그 이상의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성스러운 축복처럼 내려앉는 그 말들 앞에 서둘러 시동을 걸고는 "아, 네. 고맙습니다" 하며 차를 빼고 마는 무심한 운전자다.
그동안 입안에서 수없이 모였다 흩어지던 못다 한 말들이,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던 애틋한 진심이, 이제는 어르신의 너른 품에 작은 불씨 같은 온기로나마 피어오를 수 있다면 좋겠다.
“어르신, 날이 부쩍 차갑습니다. 오래전부터 늦은 밤 퇴근길마다 어르신을 뵈며 참 많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추위가 닥치기 전 환한 조명 아래서 고요히 책장을 넘기시던 그 멋진 모습은 지친 제게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건네주시는 따뜻한 인사 덕분에 제 마음만은 늘 봄날 같습니다. 어르신께서도 부디 강건하시고 매일이 복된 날들로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포카칩을 닮은 노란 달이 유난히 예쁘게 뜬 밤, 충전소를 나서는 차창 너머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가 흐르는 듯하다. 어르신의 모습은 어둠 속에 남겨두고 떠나오지만, 그분이 건네준 정겨운 인사말은 겨울밤의 시(詩)가 되어 내 마음을 가득 채운다. 백미러 속 충전소는 환한 불빛을 머금은 채 점점 작아지지만, 그 빛만은 칠흑 같은 밤을 건너는 이들에게 묵묵히 응원을 건네는 삶의 등대가 되어 그곳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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