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소통의 도구다. 심리학, 소통 전문가들이 하는 얘기를 굳이 빌어오지 않아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큼의 상식이다.
그러나 남편의 말을 듣고 있을 땐, 과연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남편의 말은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시작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부터 하더라도 듣고 있는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가끔 되묻기도 하고 이쯤에서 끝내야 하나 등, 상대를 위한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남편은 그런 포인트가 없다. 아예.
자기 말만 하는 남편 말을 듣고 있으면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단 생각이 든다. 차라리 빅스비한테 말하지. 왜 나한테? 당신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나와 대화를 하지 않아서 갑갑해지고 내가 벽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친절하게 때론 윽박지르듯 또는 달래듯 말해봐야 소용 없었다. 19년 동안 해봤다. 그때마다 이런 게 대화 아니냐며 그냥 계속 자기 말만 한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남은 생을 어떻게 견디나 싶었다. 그래서 남편의 말 습관을 고치겠다는 의지와 아직도 대화를 잘 못한다며 무시하는 말로 찌르곤 했다.
[당신은 왜 나에게 질문을 안 해?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안 궁금해? 부부상담할 때도 상담사님이 말했잖아. 아내를 살피고 물어보라고. 관심갖고 질문도 하고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그 말과 관련된 말을 하면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듯이 대화를 해야지. 그래야 사람이 사는 것 같지. 어떻게 맨날 자기 얘기만! 매번 설명하고 강의하고. 내가 설명해 달래? 내가 당신 학생이야? 당신이 내 상사냐고! 당신 회사 동료도 그랬다며~ '당신은 천동설'이라고. 모든 게 당신 위주로만 돌아가는 줄 안다고. 밖에서도 그런 피드백을 들었으면 좀 고칠 생각을 해야지. 이게 무슨 대화야.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데!]
구구절절 내 입장에서 '맞는' 소리만 했다. 상담사의 조언과 남편 직장 동료의 말을 근거삼아 내가 맞다는 의도를 거칠게 전했다. 나이가 50이 되도록 '대화'를 왜 저렇게 못하냐며 시비하는 마음, 상대방 얘기엔 관심도 없는 나르시시스트가 아닌가라는 짐작, 넌 왜 그것밖에 못하냐며 무시하는 마음까지 섞어서 남편을 찔렀다. 내가 맞고 넌 틀렸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남편에게 우다다다 내뱉었다.
문득 그런 내 모습을, cctv로 내가 보고 있는 듯했다. 이보다 더 보기 싫은 클리셰가 있을까! 자기 얘기만 하는 남편 말이 듣기 싫을 때마다 되풀이되는 장면이다.
안 되겠다. 내 생각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그런 사람으로 사는 게 싫다. 지금부터는 다르게 하자. 안 그러면 나이가 60이 되고, 70이 돼도 이러고 있겠구나 싶었다. 얼굴은 쪼글쪼글해지고 입에선 더 쭈글쭈글한 말을 쏟아내는 모습을 상상하니까 윽~ 끔찍했다. 남편은 말을 싸고, 나는 말을 쏟아내는... 서로 뭐가 다를까. 지금 당장 나를 안 바꾸면 내일도 똑같이 이러고 있을 텐데. 그렇게 나이 들긴 싫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빼기명상 강사님이 알려준 팁이 생각났다.
'외우세요. 상대가 이해 안 되고 인정이 너무 안 돼서 마음 빼기도 잘 안될 땐, 일단 사람을 외우세요. 저도 그래요. 여긴 외국이라 정말 별의별 인간이 다 있는데 한국에선 못 봤던 유형의 사람도 많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외웠어요. 이 사람은 이럴 때 000 한다. 이런 식으로'
아, 맞다! 그게 있었지. 현재 난 속이 좁다. 내 좁은 마음에선 남편을 수용할 그릇이 못된다. 그럼 일단은 나도 외워보자. 암기과목을 외우듯이 포스트잇에 썼다.
남편은 '사람'에게 관심이 1도 없다. 늘씬한 여자에게 흥미는 있지만.
그래서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리액션을 해주면 1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자기 얘기만 떠든다.
기분이 좋아지면 깐족거림을 주체하지 못하며 말을 싼다.
그렇게 쓰고 나니 좀 객관화되는 듯했다. 포스트잇과 나와의 거리만큼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었다. 포스트잇을 다시 보면서 '아, 맞다. 이런 사람이었지' 싶었다. 대화할 때 당신은 항상 오답이라고 말해서였을까, 이런 사람이라는 걸 있는 그대로 인정한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걸 느꼈다. 그저 다정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바랬지.
그리고 욕하지 않았는데 욕 해버린 것처럼 속이 살짝 시원해지기도 했다. 써놓은 것을 읽으며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적어봤다. 2가지다.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듯이 남편과 말을 주고받고 싶었다. 알쓸신잡에 나오는 패널분들은 상대가 하는 말을 눈을 바라보며 주의깊게 듣고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궁금하면 물어보며 서로 존중하며 대화했다. 남편과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심오한 주제 같은 게 아니더라도 아이 교육이나 다음 달에 갈 여행에 대해서만큼이라도.
두 번째 바라는 건 나 자신에 대한 거였다. 남편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하든 말든, 대화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시비하지도 말고 나이가 50이 됐는데도 사람한테 관심도 없냐며 무시하지도 말고. 자기 말만 늘어놓아도 '그렇구나' 받아주고, 남편의 말을 정 못 견딜 땐 무조건 참기 보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을 무심하게 끄듯이 평온한 마음상태가 되길 바란다.
첫 번째 것은 무리다. 이건 패스다. 이게 실현되려면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남편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과감히 빨간색 볼펜으로 두 줄을 죽죽 그었다. 두 번째 건 시도해 볼 수 있다. 되든 안되든 일단 나만 바꾸면 되니까. 최소한 노력이라도 할 수 있겠단 생각에 도전의식같은 게 생겼다.
다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