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규칙을 정하고 지키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것은 제가 부족함이 많아서 스스로 행동의 범위를 정하지 않으면 절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아서이기도 하고 또한 큰 틀이 정해졌을 때 결정을 더 쉽게 할 수 있고, 후회는 적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순간적으로 대처하는 순발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이렇게 큰 틀을 잡고 그 안에서 결정을 내려서 제 모자란 점을 메꾸고자 하는, 스스로의 방어 기작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키우기 앞서서 제 스스로에게 6가지 규칙을 정하고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제가 만든 규칙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아이와 같은 곳을 바라보기: 아이에게 어떤 일을 지시할 때 왜 그 일을 하는 것인지, 아빠가 기대하는 결과는 무엇인지를 설명해 줄 것!
- 눈높이를 맞추기: 내가 아이와 같은 나이 일 때,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은 아이에게 기대하지 말 것. 그리고 내 기억 속의 나는 미화되어 있음을 기억하고, 아이를 잘 관찰해서 아이의 눈높이에서 바라볼 것!
- 아이의 장점 찾아주기: 아이가 현재의 나보다 잘하는 일이 있다면, 그리고 내가 그 나이였을 때보다 잘하는 것이 있다면 아이에게 무엇을 잘했는지 말해주고 칭찬해 줄 것!
- 사과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아이에게 사과할 것.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발전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본을 보여주기!
-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시키기: 내가 싫어하는 것. 혹은 내가 아이의 나이일 때 싫어했던 것은 아이에게 시키지 말 것. 하지만 그것이 청소처럼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본을 보일 것.
- 아이는 나와 다른 인격체라서 나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할 것.
제가 이 규칙들을 잘 지켰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늘 지키려고 노력을 했고 이러한 규칙들이 아이를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순간순간 제 자신을 행동을 돌아보게 해 주고, 제가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하고 규제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아이에게 아빠가 부족한 것이 많아서 미안하지만 아빠는 더 잘하려고 늘 노력하는 점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아이들에게 얘기했을 때, 아이들이 최고의 아빠라고 말해줘서 참 고마웠습니다. 여전히 제가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잘 알기에,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받아줄 수 있는 아이들로 커준 것 같아서 고마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규칙을 지키려고 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너무 엄했던 적도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너무 제 원칙에 얽매이는 그러한 실수를 했던 것이죠.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큰 아이가 중학교를 다닐 때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떤 일로 화가 났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가 잘못한 것인데 자꾸 이상한 변명을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아, 많이 화가 났었습니다. 아이가 잘못한 것을 하나하나 따져가면서 왜 잘못했는지, 무엇을 잘못했는지 논리 정연하게 예시를 들면서 꽤 오랫동안 아이를 혼냈습니다. 특히나 아이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우리 부부가 한편이 되어서 아이를 코너에 밀어붙이고 혼을 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기가 팍 죽어서 세상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아이를 한참이나 혼내고 나서, 나는 클 때 저렇지 않았는데, 나는 저 나이 때 더 철이 들었었는데,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혼자서 화를 삭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분명히 어려서 잘못을 한 적도, 엄마한테 혼난 적도 있을 텐데 난 어떻게 했지?"
저는 그럴 때면 늘 제 편이 되어주셨던 외할머니께 쪼르르 가서 내 편이 되어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이모에게 가서 예쁨을 받으면서 마음에 안정을 찾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맘 붙일 친척하나 없는 내 딸은 누구에게 서러움을 호소할 수 있으며 아빠, 엄마에게 받았을 마음의 앙금과 억울함을 어디서 풀 수 있을까 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잘못을 하고도 반성하지 않아 보이는 아이에 대한 제 마음속에 있던 화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오히려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불쌍함만이 가득 찼습니다. 아이도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었을 테고, 그 행동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있었을 터인데 제가 아이가 그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너무 다그친 건 아닌지 하는 후회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한 아이의 눈에는 아빠가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보였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저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과학도서를 보고서 상당히 놀랐던 사실 중 하나가, 물이 온순해 보이고 약해 보이는 물질이지만 물이 수증기로 변하면서 부피가 몇천 배로 팽창하면 쇠로 만든 통조차도 폭발시켜 버릴 수 있는 큰 힘을 갖게 되며, 그러한 증기의 힘을 이용해서 증기기관을 만들고 현재까지도 전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마음속에만 넣어두면, 마음의 압력이 점점 높아져 결국은 폭발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게다가 아직 마음이 다 크지 못한 아이는 그 폭발을 어떻게 조절할지 모를 테니, 더욱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 아이의 마음속에 담긴 말과 생각, 원망과 어려움은 분명히 나갈 곳을 찾고 있을 텐데,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는 내가 아이를 망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조금 더 빨리 깨달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그 후로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의 잘못이 확실해 보여도,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혼내면 아이의 편을 들어주려고 노력합니다. 부모 중 한 사람이라도 물러나서 아이가 물러설 곳이 있도록 해주려는 작은 배려를 합니다.
이러한 고민을 하다가 읽게 된 것이 존 가트맨 박사의 감정코칭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보면서 제가 이제까지 아이에게 말했던 방법이 매우 공격적인 언어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는 '너는'으로 시작하는 훈육방법(예: "너는 어떻게 XXX를 할 수가 있니?", "너는 왜 XXX도 못해!", "XXX를 하는 너는 정말 나쁜 아이야!")을 버리고, 또한 아이의 행동을 일괄 지어서 혼내는 것(예: "너는 왜 늘 그 모양이니?", "너는 왜 하는 것마다 다 그렇니!")도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이 아이가 커나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행동과 아이는 하나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제 언어들은 아이의 행동과 아이의 인격을 하나로 만들어서 아이를 혼냈었고, 또한 나와 아이가 다른 인격체로서 서로가 다른 옳음을 가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 언어는 저희 믿음에 반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로 '나는'으로 시작하는 단어로 훈육을 바꾸었습니다. "아빠는 네 이 행동 때문에 이런 이유로 상처를 받았어. 그래서 앞으로는 이렇게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빠는 네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지금의 모습에 안주하는 것이 화가 나"처럼 왜 제가 화가 나는지를 설명하고 아이를 일방적으로 혼내는 대신에, 감정 교류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렇게 표현 방법을 바꾼 덕분에 20살이 넘은 아이와도 속에 있는 얘기도 털어놓고 아이의 고민을 들어주고 함께 좋은 해결법을 찾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예전의 저와 같은 모습을 하고 계시는 분이 계신다면 저와 같은 후회를 하지 마시고, 제 실수를 통해서 아이와 좋은 유대관계를 맺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존 가트맨 박사의 감정코칭에는 이보다 더 많은 좋은 내용이 있으니 아직 읽어보시지 못했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