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

by 소인

杂感 (10)

휴무일이라고 해서 멍하니 쉬는 건 아니다.
근무일이면 도시락 싸서 땡 하면 집 나와 저물도록 가자미 눈 되도록 길 위를 쏘아보다 퇴근하면 된다. 자잘한 집안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휴무일이 되면 없던 일이 툭툭 튀어나온다. 겨울 파카를 세탁기에 돌리고 설거지를 끝냈다. 엎드려 책 읽다 조는데 바람이 휙 불어 보일러실 문의 유리창을 부순다. 수행하는 스님처럼 마음 갈앉히고 하나하나 유리 조각을 담는다. 청소부 다칠세라 몇 겹의 종이에 싸서 종량제 봉투 한가운데 꽁꽁 싸서 빌라 수거함에 내놓는다. 이 지방은 음식물쓰레기를 땅에 묻는다. 외진 골짜기의 쓰레기산을 본 적이 있다. 산책 중독이 된 개는 눈 빠지게 나의 행동을 주워 담은 채 졸졸 소리 나도록 따라다닌다. 녀석의 발바닥은 폭신한 우레탄 재질인데 이미 굳은살이 박였다. 아스팔트 시멘트 바닥을 가리지 않고 달리는 데 특화되었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면 그건 생명의 경외에 대한 불경스러운 말이 될까. 생명은 단지 한 번뿐인 카이로스란 점에서 조건을 무시하고 경외의 대상일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서 프리모 레비는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말라는 게 우리의 지혜였다.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 오기 전 삶에 대한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흐릿했고 아득했다'라고 고백한다. 생과 사의 극한에서 살아남은 레비는 수용소의 기억을 떠올리며 세상을 향해 뜨거운 전언을 쏟아냈지만 전쟁이 끝난 후 세상은 전쟁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졌다. 자살로 마감한 그의 결말이 던지는 메시지는 '흐릿한 삶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 아닐까. 죽음으로 표현하려 했던 그의 경고는 굶어 죽는 사람이 드문 세상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삶은 시대마다 다른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대체 변화하지 않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있단 말인가.

현실이 되어버린 전쟁의 공포가 지구를 휩쓸었을 때 모두들 어디에 있었던 걸까. 하나둘 사망자의 숫자를 세다 보면 어느새 숫자 감각이 사라진다. 한 명과 수만 명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쟁 상황을 벗어나 사망하는 사람들의 숫자에는 공포의 감각이 묻어날까. 자살과 치명적인 병, 산업재해와 교통사고, 범죄...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 나쁜 짓 하면 반드시 벌 받는다, 꽃길만 걸으세요, 부자 되세요, 노력하면 성공해요.. 대표적인 거짓말이다. 현실을 긍정하란 말보다 기만적인 아포리즘도 없다. 본질을 들여다보고 현실을 참아내란 뜻보다 고통과 쾌락이 존재하는 현실을 주체의 해석으로 버텨내라는 의미로 읽는 게 낫다. 현실이 절망이라면 종교는 좋은 탈출구가 된다. 내세를 낙원으로 상정하는 세계관은 절망적인 현실을 위무하는 방편일 수도 있다. 우주의 순환과 생성, 사멸은 목적 없이 반복된다. 어느 날 갑자기 지구라는 혹성이 사라진다고 해도 우주는 자신의 숨을 내쉴 것이다. 잠깐 사이의 지구의 생멸을 누군들 기억하기나 할까. 기억하는 누구는 존재하긴 하는가. 그럼에도 인간은 꿋꿋이 살아간다.

아는 만큼 본다고 했지만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인식의 지평은 우주 공간만큼이나 아득해서 초월의 초월을 곱해도 헤아리기가 가뭇하다. 삶의 양식에서 인간은 보편적인 약속을 공유하며 산다. 보편적인 약속은 공동체의 가치, 도덕과 윤리, 상식과 비상식 정도 이리라. '보편'조차 절대 가치는 아니다. 그러하니 얼마나 고단한 삶이랴! 아군과 적군의 뒤편에서 기도하는 사제를 보면 낭패스럽다. 하나님은 따로따로 계시니 우리 편만 걱정한다. 쏘아 죽여야 살아남는다는 건데 내가 쏘아 맞히는 건 인간이 아니라 악마화 한 적일 뿐. 개독교는 자신들의 아까운 복음을 믿지 않는 자를 악마로 규정해 혐오하고 배제한다. 극단적인 예라고 토가 나올지 모르지만 일상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부드러운 배제와 혐오, 따뜻한 악마가 있단 말인가! 걱정할 것 없으면 기실 고단할 것도 없으니 또한 얼마나 편한 존재랴!

LH에서 정보를 알아내 땅 투기를 했다는 소문이 시끄럽다. 소문은 사실로 드러나고 이참에 투기 세력을 발본색원한다며 으름장을 놓는 정부 여당과 보궐선거의 호재로 이용하는 야당이나 생선 문 고양이이긴 마찬가지다. 너도 나도 생선 물고 달리는 판국이다. 그렇다면 국민은 개 돼지가 아니라 도둑고양이가 된다. 노자는 천장지구(天長地久)라 했는데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부자생(不自生)"하기 때문이다. 자기의식 없이, 자아를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조작하지 않는다. 천지는 자아가 없이 만물을 끊임없이 탄생시키고 기르는 생생불이(生生不已)에 의지하여 장존(長存)한다고 했다. 땅이 땅 본연의 뜻에 합당하지 않게 사용된다는 건 인간과 멀어진다는 뜻이다. 투기와 재산증식 후 비싸진 땅에 나무를 심는 건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웃을 거다. 어느 천년에 나무를 베어 가구를 짤 건가. 자본의 생산성과 효율은 땅을 뒤집고 부풀려 풍선처럼 만들다가 황소를 따라한 개구리처럼 팡! 터질 거다.

프리모 레비의 경고도 월든 호숫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전언도 사막의 폭풍 속에서 희미하게 작아진다. 모래폭풍이 지나간 다음날 사람들은 바뀌어버린 길과 샘을 지도에서 다시 찾으려 애쓸 거다. 연인의 집이 사라지고 무지개를 만나러 걸었던 길이 지워졌다. 염소와 양이 사라졌고 예식장과 학교가 사라져도 사람들은 두리번대며 찾아다닌다. 그렇게라도 삶의 가치를 찾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행복은 두리번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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