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 집을 나섰다. 뚝뚝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양철지붕을 톡톡 건드리는 빗물은 봄이 발밑에 떨어져 마당을 적시고 땅을 파고들어 움츠린 것들을 깨운다. 엊그제 눈비 맞은 뼘 뙈기 터앝에서 파란 싹을 보았다. 하도 작아 한참을 살핀 끝에 찾았는데 그게 상추 싹인지 쑥갓 싹인지는 분별이 어려웠다. 양쪽으로 타원형의 떡잎을 내밀고 가늘고 여린 줄기로 흙을 받치고 서있는 모습이 놀라울 정도였다. 줄기는 아래로 갈수록 하얀색이었다. 뭔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에 반가웠다. 생성과 변화는 멸절에 이를지라도 삶의 모습이다.
온도와 습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비닐하우스의 채소는 이미 풍성한 수확을 거쳐 밥상 위를 점령하는 중이다. 계절에 관계없이 야채를 먹는 시대지만 역시 제맛은 제철에 나는 것들이다. 하루나(はるな, 春菜) 겉절이로 삼겹살을 구워 먹었고, 노지 시금치로 된장국을 끓였다. 바람과 햇빛, 물기와 가뭄을 견디며 거친 땅에서 몸을 키우는 노지의 채소는 온실의 것과는 차이가 크다. 노지 채소는 드러난 생태 환경에서 벌레가 뜯어먹어 구멍 나고 빛깔도 들쑥날쑥이고 모양도 제각각인 반면에 곱게 자란 것은 때깔이 곱고 상처가 없어 보기에 좋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처럼 크기와 모양이 균일하다.
동일화의 일체성이 지닌 점은 다양성을 죽이고 상황을 객관화한다는 거다. 언어는 개념화의 폭력으로 인해 전쟁이라는 참극을 벌인다.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고 진리의 다양성을 말한 니체는 진리를 찾아가는 삶이 아닌 삶을 위해 기여하는 진리를 만들어내는 게 힘에의 의지라고 주장했다. 대체 '진리'라는 게 인간을 속박하고 지배한다면 그런 불편한 진리라는 물건을 어디에 쓸 것인가. 종일 창을 통해 길을 바라본다. 어린 단풍나무 가로수는 비에 젖었다. 엊그제 휴대폰을 들여다보다 논으로 처박힌 트럭에 부러진 단풍나무는 말뚝만 남은 채 떨어지는 빗물을 맞고 있다. 빈 논에는 파릇한 풀 싹이 융단처럼 깔리기 시작한다. 민들레 꽃다지 소루쟁이 싹이 마른풀을 제치고 논둑에 번진다. 회색의 도시 또한 봄비에 젖어 있을 거다. 오래전 여자는 비를 구경하며 상념에 잠겼을지 모르겠다. 눈앞에 펼쳐진 밭을 오가며 농사를 준비하던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오가는 차량이 뜸한 토요일 두 사람이 들앉은 초소에 라디오 소리가 도란도란 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