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感 (9)
느릿느릿 생각하고 굼뜨게 움직이니 이틀 휴무가 천날 같다.
종종 걷고 생각하고 움직이면 시간도 빠르게 달린다. 개념화된 인식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은 한편으론 덧없고 허망하게 느껴진다. 공자 이전의 사람인 노자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고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도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라고 말했지만, 물은 더럽혀지고 민심은 거꾸로 흐른다. 모두 번드레한 탐욕을 채우려는 사람의 저지레다. 현재는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땅이자 목숨이 하나라는 게 서러울 정도로 화양연화(花样年华)의 나날이지만, 누구에겐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생지옥이다. 사회의 구조는 교묘하게 조작되어 화석처럼 굳어진 개념화된 신자유의 논리에 날 새고 저문다. 즐기는 게 행복이라는 아포리즘은 철저히 상대적이어서 허망하다.
겨우내 집안에서 키웠던 천사의 나팔을 지인에게 주기로 했다. 늦가을 가지를 잘라 물병에 꽂아두었던 천사의 나팔은 초록 잎을 밀어내며 살아냈다. 강아지를 뒷자리에 태우고 아내와 집을 나섰다. 개는 창밖으로 고개 내밀고 코를 벌름대며 자못 만족스럽다는 표정이다. 내비게이션을 켜고 찾아가는데 한길을 벗어나 호젓한 산길로 안내한다. 야트막한 고개를 넘고 띄엄띄엄 집이 있는 산촌으로 자꾸 들어간다. 손톱만 한 촉이 나오는 산벚나무 가지 사이로 산새가 톡톡 뛰어다닌다. 양지뜸의 진달래는 금세라도 튀밥처럼 터질 기세다. 산수유 노랗게 뜬 얼굴이 산자락을 노랑 물감으로 물들인다. 덩달아 달뜬 사람 춤이라도 춰야 하나. 춤도 좋고 술 한잔도 좋은데 마음은 분위기처럼 계절을 타지 않는다.
도시서 들어온 지인은 한갓진 산골에 손수 집을 짓고 정원을 꾸몄다. 남편은 일하러 나가고 부인이 텃밭에서 봄볕을 쬐다 반갑게 허리를 편다. 땅을 뚫고 올라온 시금치를 캐고 보약이라는 파란 초봄의 당파 한 포기를 쑥 뽑아준다. 주름진 그녀 얼굴에 환한 햇살이 퍼진다. 산으로 올라가는 산자락엔 사과 묘목을 심고 응달엔 표고목을 세웠다. 한평생을 일해 자식을 키우고 집과 터를 장만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주변마다 정갈한 주인의 손길을 거친 흔적이 보였다. 잔디밭에서 뛰놀던 개에게 물을 떠주고 커피를 마시고 손 흔들고 헤어졌다. 면소재지를 통과해 댐으로 방향을 잡았다.
물 바닥에 수몰된 마을이 잠든 물길에 다다르자 수면 위로 솟아난 죽은 나무가 그곳이 길이었다는 걸 알려준다. 물 가생이에 살아남은 버드나무 우듬지가 연둣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물을 가둔 댐의 물빛은 상류에서부터 탁했고 썩은 내를 풍겼다. 사대강 물을 정화한다고 보조 장치로 만든 댐은 상류 마을에서부터 축사 오수와 퇴비가 빗물에 쓸려 모이면서 본래의 떠들썩한 기능은 자취를 감췄다. 정책 입안과 결과가 따로 노는 행정은 누가 책임지나. 째진 눈으로 돈밖에 볼 줄 모르는 개다리 잡놈은 감옥에 들어갔다. 강을 끊어 곳곳에 콘크리트로 덧바른 둑을 어찌하나. 물은 백성과 같아서(民猶水也) 위에서 아래로 순리대로 흘러야 불만이 없다. 물길을 막아 돈은 돈대로 쏟아붓고 똥물을 가두는 꼴이 되었다. 부자 만들어준다는 사탕발림에 사기꾼을 찍은 대중은 산하가 똥물에 튀하든지 말든지 아랑곳없이 투기장으로 달려간다. 지극한 물욕은 대중의 바람이다. 보고 또 봐도 한숨만 나온다. 자연 자본은 인위적으로 생산하는 문명의 이익과는 견줄 수 없는 가치다. 훼손된 생태의 복원에는 천문학적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데 생태 보전의 인식은 허접한 그물이다. 숭숭 뚫린 그물코 사이로 개발과 이익이 넘나든다. 지구는 서서히 앓기 시작한다.
이데올로기 전쟁을 치러야 했던 대중이 폐허에서 일으킨 건 가난 탈출의 집념이었고 식민과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자 분단된 땅에서 남은 건 생존을 위한 개인의 몸부림이었다. 고착된 분단 현실에서 통일은 일부 시민의 몫이 돼버린 느낌이다. 가난한 집 돌아오는 제사 없어도 혼담은 가물에 콩 나듯 한다. 강원도서 선생질하는 아들은 밥을 끓이는지 죽을 끓이는지 감감 소식이고, 딸애는 기간제 일을 나간다. 하늘은 넓고 땅은 오래가는데 겨울이면 겨울을 앓고 봄이 오면 봄을 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