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304)
하늘은 투명하고 맑다.
하얀 구름이 드문 하게 깔린 가을 하늘은 파란 잉크를 풀어놓은 듯 진한 파란색이다. 초소 건너 풀밭에는 꽃대를 올린 갈대가 풍성한 갈품을 예약하고 부푸는 중이다.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을 메웠던 덤프와 레미콘 행렬이 뚝 끊어졌다. 일찍 연휴에 돌입한 모양이다. 매연 흙먼지서껀 타이어 가루 안 날리니 우선은 살 것 같다.
점심 먹고 교대 휴식까지 지난 시간 배 아파 길 건너 로칼푸드에 갔다.
가까운 거리여도 차를 몰고 가는 게 빠르다. 주차장은 거의 찼고 한약우 식당엔 손님들이 꽤나 몰려 있다. 불판에 고기를 굽거나 입구의 매장에서 고기를 사는 사람이 많았다. 옆의 로칼푸드 매장에도 사람들이 왁자했다. 여기 초소에 근무하면서부터 배 아파 화장실을 찾은 게 세 번째다. 한약우 식당에 딸린 화장실을 사용하는 거다. 보통 오전에 들렀는데 오늘은 오후에 급하게 달려갔다. 시원하게 일을 해결하고 나오다가 한약우 식당 유리창을 보니 안쪽에 죽 늘어선 식탁에 손님이 가득하다. 불판의 고기를 뒤집는 사이로 이름표를 단 종업원이 바쁘게 다닌다. 그냥 초소로 돌아가려다 로칼푸드 매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람들의 얼굴은 어두워 보였으나 뭔가 들뜬 기색 스며 있다. 송이는 싸지 않다. 농부가 뒷산 올라 랜덤으로 딴 송이 500g에 십오만 원. 작년엔 송이 맛도 못 봤다. 일 킬로에 삼십오 만원이면 등외라도 송이 맛은 접는 게 낫다. 능이버섯 등이 산양삼과 함께 진열대의 냉기를 쐬고 있다. 지역에서 생산한 농산물이 진열대마다 골고루 모여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현실 인식이나 역사 인식이 모자란 어떤 놈은 손발 노동을 폄하했지만 지렁이가 땅을 분해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지구가 멈추듯 손발 노동이 없으면 그놈 아가리에 처넣는 먹거리가 끊어진다. 이쯤 되면 현실 인식이 모자란 정도가 아니라 반생명인 걸 알겠다. 참 섬뜩한 인간이다. 그렇게 살았으니 그렇게 인식하는 건 당연하다.
세상이라고 하는 사회도 그렇고 가족, 친구, 인간 관계도 원하는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원하는 건 가치의 방향인데 우연성이 틈입하면 인생은 올 풀린 스웨터처럼 엉망으로 치닫기도 하고, 그 치달음이 때론 행운을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삶은 럭비공 같다. 물론 가치의 방향대로 법조문 달달 외워 사시에 패스해 판검사나 변호사 되고 공부 잘해 아이들 가르치는 선생이 되거나 사람 고치는 의사가 된다. 직업의 천차만별이야 그를 부자가 되게 하고 쪽박을 차게 한다. 문제는 착각이 부르는 만족을 모르는 탐욕이다. 우리는 중산층을 대전제로 자본과 연대하는 공동의 목표를 가졌다. 중산층이 마치 종교의 내세와 같은 천국의 문이다. 그러나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의 문양에는 고통에 일그러진 화신이 덕지덕지 악취를 풍기며 새겨졌다. 악취와 창피함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그 문을 통과해야 한다. 온갖 모멸과 비방을 감수하고 몸 던지는 자 차고 넘친다. 나만 미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가 미쳤다.
까놓고 얘기하면 천당 천국 극락 지옥의 내세를 믿는 자는 소수일 거다. 살아 경계와 위안을 삼고자 내세를 기획했다. 죄짓고 벌 받는 자는 소수고, 대부분 죄를 짓고도 벌은커녕 떵떵대며 활보하다 죽는다. 전통은 광주의 영령을 피해 뻔뻔스레 구십을 넘겼고 죽일 놈들 대부분 장수한다. 불공평도 이런 불공평이 없고 부조리도 이런 부조리가 없다. 그러나 나만 몰랐다. 세상의 본질은 부정성과 부조리다. 그러니 배 아플 건 없다. 다만 찢어 죽일 놈을 찢어 죽이지 못한 게 서러운 목숨 이 땅 산하에 쌔발렸다.
세상에 변하기 어려운 게 사람의 마음이다.
환경의 조건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인간이란 동물은 자신이 보고 느낀 것만 전부인 줄 착각하고 믿는다. 죽어도 믿기 때문에 환경과 조건이 다른 곳에 가면 금세 팍 고꾸라져 죽는 줄 안다. 촌놈들이 그렇다. 도시나 들이나 꽉 막힌 인식으로 세상을 살면 그게 촌놈이다. 그러니 촌놈은 도시에도 들판에도 산속에도 바닷속에도 산다. 촌놈은 자기주장으로 살지 않는다. 자기주장이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옳다고 하는 대세를 따라간다. 그러느라 눈치만 보고 살아서 사팔뜨기 인생을 산다. 기승전 가족 이기적 공생애고 기승전 나라에 충성 부모에 효도다. 만나서 아파도 가족이라고? 관계해서 아프면 가족이 아니다. 영혼을 갉아먹는 좀비다. 지역 사회에서 존경받는 교양 치레보다 권력의 단맛을 선사하는 의원 배지에 올인한다. 난 그분들의 선량한 본심을 믿지 않는다. 가문의 명예와 짭짤한 보수로 뒤를 받쳐주는 권력의 악취가 맡아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 번 맛 들인 놈은 죽어도 빠져나오기 어렵다. 뻔하고 흔해빠진, 진부한 나리가 되는 길밖에 없다면 지나친 말일까.
많은 사람이 선물 꾸러미를 안고 들고 고향으로 향한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들길 따라서 논배미마다 밥 익는 냄새 그득하다.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 견뎌내고 좋은 집에 큰 차 타고 시골 내려오는 자식보다 부모 굽었던 허리 펴지고 쫄아든 어깨 활짝 펴지는 순간이다. 씨팔, 코로나가 어떻고 나라 살림 생태오염 기후 위기 어쩌고 떠들어도 내 자식 내 새끼 등 따시고 배부른 게 젤이야 암만. 돈이라고 양잿물 아닌 담에야 싫어하는 놈 있을라구. 어차피 한 번 왔다 쏜살같이 떠나는 세상 눈 질끈 양심 질끈 속이구 가는 게 윗질이야. 살아 똥창 째지게 가난해봤자 핍박 설움밖에 더 있어. 먹구 뒈져봐, 송장 때깔 기똥차다니까. 나이 칠팔십을 처먹고도 자기 인생 한 줄 주워섬기지 못하는 삶 어디 한둘인가. 그를 욕하자는 게 아니다. 그렇게 살도록 탐욕을 조장한 환경이 역사가 국가가 이웃 공동체가 웃프단 거다. 욕망은 삶의 에너지인데 방향을 잘못짚었다. 남을 누르고 동료를 속이고 법을 피해 소수를 혐오하고 집단 몰 지성의 이기주의로 분열을 양분으로 커버렸다. 이 많은 분들 어찌하나. 내버려 두면 자연 감소하는데 지구의 시간은 짧다.
부모 팔자가 반 팔잔데 이도 저도 비빌 언덕 없는 청년 이생망이니 삶의 도락이나마 건져 보는 게 의미 있겠다 싶다. 누가 누굴 가르치려 든단 말인가. 내 존재의 의미로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움켜쥔 상념 활어처럼 뛰는데. 그러니 잘난 주둥이로 누굴 위하고 정의하지 마라. 모두 소중하고 높으신 분들이다. 집을 집으로 알던 시절 가니 집이 집이 아니게 되었다. 과시 욕망으로 불타던 정념과 살아 똥 빛으로 반짝이던 인식표 사자의 앞니빨 사이 박히고 활활 타는 불길 속으로 중산층 하나 사라진다. 잘코사니! 명복을 빕니다. 티 없이 맑은 가을날 선물 보따리 든 사람들 가난의 퉁수 불던 고향 앞으로 눈썹 휘날리며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