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303)
어쩌다 보니 도시 출신이 바닷가에서 열다섯 해를 살았다.
도시 출신이라고 해서 날 때부터 도시에서 죽 살았던 건 아니다. 스무 살 넘어 도시를 떠났고 다시 돌아와 직장 생활을 한 건 십 년이니 도합 삼십 년을 산 것이 되지만 아버지의 전역과 함께 인 서울 했으니 삼십 년도 못된다. 본적은 아버지를 따라 종로구 낙원동이다. 나머진 지방을 돌며 살았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어도 어딘가 흘러들어 살게 된다. 서울에서 아내의 고향인 내륙으로 내려간 지 오 년 만에 생계를 위해 낡은 살림 탈방이며 강원도로 갔다. 늘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보며 산다는 것에 처음엔 설렜다. 오래전 제주도에서 입도(入島) 두 달 되니 바닷물이 기름처럼 느껴졌다. 섬에 갇힌 답답증에 미칠 지경이었는데 석 달이 넘자 증세는 사라졌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아홉 해를 갇혀 살며 세한도(歲寒圖)를 그렸다. 제주도에서 노가다를 했던 휴학 시절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사하고부터 설레던 처음의 심경은 시간이 지나자 바다를 데면데면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사랑이 식은 연인 같았다. 그러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을 사귀었고 바닷속 내용이 궁금해졌다. 어판장에는 복어, 청어, 꽁치, 고등어와 문어, 골뱅이, 홍게가 철 따라 좌판에 널렸는데 어릴 때부터 수영을 좋아한 나는 바닷속에 들어가 갯것을 잡고 싶었다.
동해는 투명한 물빛만큼 생산물도 몇 가지로 제한되어 있다.
바다는 생명을 품은 개펄이 있어야 갖가지 생물이 자라는 터전이 된다. 마침 아는 이가 모랫바닥을 긁는 거랭이로 조개를 잡았다. 또 다른 이는 대롱으로 숨 쉬며 작살로 물고기를 찍어냈다. 귀신같은 솜씨로 물질하는 사람은 이곳이 고향이고 조개 잡는 사람은 보길도 출신이었다. 두 사람에게 대충의 사냥법을 배웠다. 바로 물옷과 스노클링 장비를 장만해 수목 관리를 하다 남는 시간에 바다로 달려갔다. 여름 내내 물에 들어갔더니 뱃살이 편평해졌다. 지금도 자전거에 아이스박스를 싣고 스콜피온의 홀리데이를 들으며 바다로 달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첫 해는 11월 초까지 바다에 들어갔는데 젖는 물옷(wet suit)이어서 하마터면 얼어 죽을 뻔했다. 암튼 첫 해부터 쏠쏠한 수확을 했는데, 조개는 기본이고 문어, 멍게, 전복과 작살로 잡은 고기로 생선회를 먹게 되었다. 어떤 날은 수산시장에서 물오징어를 사 왔더니 딸이 그것도 아빠가 잡은 거냐고 할 정도로 물질에 빠져 살았다. 두어 시간 자맥질로 조개를 잡으면 40L 아이스박스를 채웠다. 자연산 섭(홍합)을 땄고 미역과 다시마를 건져 마당에서 말렸다. 신났던 물질은 차츰 시들해졌는데 그건 해마다 관광객이 몰려와 첨단 장비(?)로 분별없는 해루질을 해대는 통에 안 그래도 백화현상으로 수초가 사라지는 물속 형편은 점점 나빠졌기 때문이다. 물과 친화적으로 살았는데 물은 경계해야 할 대상임은 물론이다 게다가 아이들을 태운 배가 어른들의 욕심으로 맹골수로에 침몰하면서 물질을 접었다. 가끔 바다를 보면 아픔이 떠올랐고 물속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문진의 골목까지 훤히 꿸 정도로 십오 년을 살다 도로 경북 내륙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이들의 발목은 혼자 먼 길을 떠날 만큼 굵어졌고 내 등은 조금 굽어졌다. 도시를 떠난 스무 살 팔도를 무른 메주 밟듯 떠돌던 시절은 천둥벌거숭이였다. 독한 자의식은 세상과 불화했고 누구의 고언(苦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곰곰 생각하면 고언이란 게 섭세의 진리처럼 느껴졌는데, 현실 순응의 습속을 따라야 편하게 살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럴수록 발길은 자꾸 곁길로 나갔다. 내가 택한 현실의 밥벌이는 고단했고 조금치의 여축 없이 흘렀지만 그 속에서 삶의 고락을 찾으려는 정념은 버린 적 없었다. 비굴하고 간사한 처세를 멀리하고 저어했지만 나도 나약한 인간이고 보면 자고 나면 어제의 신념이 흔들릴 때도 많다. 도시와 바다, 농촌에서 살면서 사람과 만나고 헤어졌다. 사랑한 기억조차 잊어버렸지만 내게 바람 같이 달려왔던 여자는 같은 속도로 떠났다. 문학 모임을 탈퇴하자 약속한 것처럼 소식이 끊겼다. 자의식을 휘두르며 인색하게 곁을 두지 않은 결과였다. 가끔 외롭지만 혼자 생각하고 쓸 수 있는 여유를 즐기기엔 충분하다. 젊어서 가졌던 인정 욕망은 버린 지 오래다. 무엇을 이루려는 욕심이나 의무감은 없다. 물 뿌려 마당 비질하듯 소쇄한 마음으로 경험과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쓰고 싶은데 거푸 잡문을 생산하니 스스로 부끄럽다. 목마른 이에게 시원한 물 한 잔 건네는 사람이고 싶은데 현실은 간장 종재기다. 누구를 가르치려들거나 생각을 강요하는 일 따윈 집어치워야 한다. 그럼에도 문장이 그런 빛을 띤다면 차라리 글을 버리는 게 나을 거다. 삶의 스승은 자신이거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볶아준 소고기를 낫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자면서 속이 메슥거렸다.
천한 뱃속에는 천한 음식이 들어가야 제격인데, 천한 음식 없듯이 천한 생명도 없다. 다만 사람의 언행이 밥과 생명을 천하게 대하고 굴리기 때문이다. 차별하는 밥과 차별하는 생명은 모든 악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동료가 안 쓰는 투망을 준다고 했다. 바닷가에 살면 종종 해루질로 먹을 것을 얻는 경우가 있다. 바다에서 투망질은 허용되지만 통발은 1인 1 통발만 허가된다. 양식장이나 어촌계가 관리하는 마을 앞 수역은 피해야 한다. 던져놓고 버리고 간 통발은 물고기의 무덤이고 바다 쓰레기다. 해녀는 통발을 보기만 하면 찢어버린다. 생계의 적으로 간주한다. 나의 놀이가 어떤 이에겐 밥그릇 깨기가 된다. 떠나기 전 동해 백사장에서 윈투(遠投) 낚시를 던져볼까, 겨울 도루묵을 잡을까.
해가 짧아졌다.
여섯 시 가까운데 어둑살이 벗겨지지 않은 마당에 개가 나와 보채지 않는다. 개는 집에 웅크리고 날이 희번해지길 기다리는 중이다. 개는 늘 깨어 있다. 자면서도 귀와 코는 쉴 새 없이 일한다. 도대체가 우리 집에 누가 침입하는 걸 용납하지 못하겠다. 이웃집 발발이가 짖으면 우리 집 개가 더 크게 짖고 사방의 개들이 봉홧불 피우듯 여기저기 목청의 동맹을 확인한다. 섣불리 발 들여논 도둑 슬그머니 내뺀다. 낮에 혼자 집 지키는 개는 우체부뿐 아니라 참새, 나비서껀 밥그릇 탐내는 똥파리까지 쫓아낸다. 심심해 지친 개가 뒤란에서 낮잠을 자면 참새들은 비웃듯이 마당에 내려와 왁자하게 떠들며 개 사료를 쪼아댄다. 작은 마당은 여름 지나 터질 지경인 초록으로 포화 상태다. 붉은 고추가 따기 무섭게 연해 달리고, 봄날 옮겨 심은 천사의 트럼펫은 가지를 사방으로 뻗어 축 늘어진 꽃대를 주렁 하게 달고 오케스트라를 준비 중이다. 화분의 메리골드는 키를 세우고 진한 색깔의 꽃을 무성하게 피운다. 여기 또한 잠시 머물다 갈 곳. 사랑과 연민을 가득 담고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