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문

by 소인

杂文(305)


내륙을 벗어나기까지 가는 빗방울이 떨어졌다.

확진자가 다녀간 고갯마루의 카페에서 아래 풍경을 보았다. 낙동강이 굽이치는 물길은 여름의 열기가 식은 채 조용히 흘렀다. 저 아래 물에서 여름날 물안경을 쓰고 바닥을 본 적이 있다. 마당 개가 태어나 처음 수영을 한 곳이기도 하다. 녀석은 물가에서 스노클링 하는 내 머리통을 걱정스레 보다 순간 물속으로 사라지자 물에 뛰어들었는데 물속에서 녀석의 네 발이 바둥거리는 걸 보았다. 개헤엄이었다. 나를 구하기라도 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무튼 녀석에 대한 나의 신뢰는 한층 업되었다. 어느 해는 사람들과 피라미를 잡기도 했는데 지금은 평일 우중의 날씨에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는데 풍경은 꽉 차 있다. 솔숲과 간간이 드러난 활엽수의 단풍 든 이파리, 희부연 산길 사이 움츠린 낮은 지붕, 촤르르 바람의 커튼이 풀리자 공중으로 길을 내는 새들 낙엽처럼 흩어지는 작은 생명들, 젖은 길 위로 오가는 차, 건축 자재를 꽁꽁 묶고 달리는 화물차. 차 안에서 보는 풍경이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멍하게 지나갔다.


잠시 후 승합차가 서더니 초로의 남녀가 우르르 내린다. 바람 쐬러 나선 모양이다. 요즘 전국의 산하엔 퇴직한 초로의 장년들이 빼곡하다. 가난을 벗어나 노후가 보장된 이들은 남은 인생을 맘껏 즐기는 축이고 나이 들어서도 자신이 밥을 벌어야 하는 이들은 죽기까지 저임금 장시간의 질 낮은 노동을 견뎌야 한다. 임계장은 '임시계약직 노인장'의 자조적인 줄임말인데 나도 임계장의 명찰을 달고 일하러 나오지 말라고 할 때까지 임시직을 기웃거려야 한다. 놀러 다닐 수 있는 말년은 운이 좋은 사람에 속한다.


커피를 따라 마시고 내처 동해로 가는데 천천히 가도 추월하는 차는 없다.


오다가 내륙에서 본 들깨는 온통 노란 단풍이 들었는데 동해는 햇빛 받는 쪽만 물들었다. 길가에 배롱나무도 늦은 꽃을 달고 있다. 바다가 가깝자 날이 갠다.


울진 바다에 간다.

동료에게 구운 계란을 주고 얻은 그물을 치러 가는 중이다. 바다 투망질인데 실은 투망 치는 요령도 모른다. 유튜브를 수십 번 보고 공원 인조잔디에 몇 번 던졌다. 그물은 생각대로 활짝 펴지긴커녕 돌돌 말리거나 찌그러진 타원형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꾸준한 연습이 숙달된 수준을 보장한다는 건 진리지만 우선 짠물에 던져 보고 싶은 충동에 빗발 듣는 날씨 무릅쓰고 나선 길이다.


나는 여전히 내 인생에서 절대적인 부분이며 주인공이다.

하지만 대다수 삶의 주인인 사람들에게 나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경험치로 따지면 그저 흘깃 엿살피며 지나치는 정도일 뿐, 나의 사유와 글이 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 있을 때 느끼고 경험한 유의미의 흔적일 뿐, 내가 사라지면 아무 울림이 없는 무명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곳의 심연은 깊고 넓어서 바닥을 모르는 우주의 블랙홀과 같이 모든 것을 무한대로 삼키고 빨아들인다. 생성하고 변화하며 움직이다 소멸하는 순환의 과정을 끝없이 되풀이하며 우주는 태어나고 폭발하여 먼지가 된 채 무한한 공간을 떠돈다. 우주의 먼지가 될지언정 나의 존재는 무대의 주인공이다. 새벽 산책길에서 만난 이슬 젖은 풀잎, 파라솔 아래 숨죽인 낚싯꾼. 그는 언제부터 물가에 앉아 수면의 찌를 노려보고 있는 걸까. 데크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진 상수리 열매. 농부의 손길이 거쳐간 고추밭엔 탄저균의 얼룩이 진 빨간 고추가 시름시름 마른다.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결별 없이는 변화도 성장도 심지어 생성과 소멸도 진부함을 벗어나기 힘들다. 결별(訣別)은 다시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이다. 사별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한 번 사는 인생은 간절한 기회를 담고 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없어도 떠나야 하는 존재의 행위는 위대하다. 담대하거나 크지 않아서 위대하다. 익숙한 길, 익숙한 사람, 익숙한 관계, 익숙한 사유와의 결별은 불편하지만 부당(不當) 하지 않은 새로운 국면을 경험하게 한다. 익숙한 것들의 죽음을 통해 새로 태어난다. 고마운 것, 감사한 것은 무사히 지낸 하루가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바다가 점점 가까워진다. 공기의 맛이 짭조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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