杂文(316)
남쪽에서 올라오는 태풍의 기운에 새벽에 비가 조금 내렸다. 지붕이 젖었다. 우리 집은 읍내 외곽의 다닥다닥 붙은 주택이라 마당 건너 앞집 지붕의 상태를 보면 비의 유무를 바로 알 수 있다. 지붕 너머로 연립 주택의 창문이 보인다. 하늘은 마당의 생김새처럼 기름하게 생겼는데 좁다란 공중으로 새가 날아오고 구름이 지나간다. 골짜기 동네의 야트막한 산의 끄트머리를 조금 볼 수 있다. 읍내 한가운데 있던 성당이 몇 해 전 옮겨와서 일요일 오전 열 시면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물론 스피커에서 나오는 기계음이다. 골짜기 중간에 절이 있다. 초파일이 가까우면 알록달록 파일 등(八日燈)이 달리고 신도가 찾아온다. 성당 아래는 군민회관 뒷마당인데 가끔 모임을 하는 소리가 골짜기에 퍼진다. 노랫소리와 사회자의 목소리가 쩡쩡 울린다.
성당과 군민회관 뒷마당 중간에 난 길로 걸으면 가파른 내리막과 오르막이 이어진다. 오르막 중턱에서 집이 끊어지고 복숭아 과수원 울타리를 길 따라 둘러쳤다. 요즘엔 발그레한 복숭아가 살을 찌우며 익어간다. 과수원을 지나칠 무렵 숨이 조금 차오르고 느티나무의 우람한 어깨가 보이는 곳이 충혼탑 초입이다. 천여 평의 땅에 한국 전쟁과 월남 참전 병사를 기리는 추모탑과 이름을 촘촘히 새긴 비석이 군데군데 놓였다. 탑 주변으로 너른 잔디밭이 있고 좌우의 경계를 따라 소나무를 심었다. 충혼탑은 개와 산책하는 코스다. 보건소 뒤편에서 오르는 계단 꼭대기에 서면 소읍의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읍을 관통하는 물길 가운데 다리가 지나고 반으로 나눈 피자 모양에 터미널과 가게가 줄 지어 있다. 멀리 미끈한 군청 건물이 보이고 새로 지은 실내체육관이 청사 뒤로 이맛 빼기를 내민다. 겨울날 새벽에 올라 읍을 내려다보며 반짝이는 불빛 속에 사람들의 삶을 상상한다. 어디쯤에 누군가 살고 내가 아는 그의 삶을 곰곰 펼쳐 보기도 하고 난 어디쯤에 와 있는지 돌아보기도 한다.
열심히 사는 것, 착하게 성실하게 사는 건 무슨 뜻일까. 모두 열심히 착하게 살지만 인생은 한대로 살아지지 않는 불안정한 반동이다. 마치 럭비공이 이리저리 춤추며 튀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말거나 악착같이 살아낸다. 어떤 이가 다른 이를 법 없이도 산다고 했을 때 무법자라고 농담했다. 타인의 말이나 행동을 비판하거나 딴지 걸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살면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생각의 습속이다. 어떤 면에서 위험하고 무책임한 말일 수 있다. 시류에 따라 흘러가고 섞이며 사는 건 자기 생각이 없는 공활한 가을 하늘 아닐까.
대화하는 상대에게 질문이 없고 자기 얘기를 줄창 한다.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지 않고 자기가 아는 게 튀어나오면 물 만난 붕어처럼 연신 뻐끔거린다. 내용과 진의를 들여다보면 세태와 시류에 꼭 들어맞는다. 과정에만 집착한다. 사안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방향과 분별에 대한 판단은 유보된다. 단순 무식의 전형이다. 말을 끝낸 표정이 자못 진지하고 자랑스럽다 못해 푹 하고 웃음이 터질 지경이다. 실은 질문이 없는 게 아니라 회피하는 것 같다. 질문에 다가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대안은 안개 속이기 십상이니 편한 대로 좋은 길을 가자는 심산이다.
질문과 함께 어깨동무하며 소거되는 건 사유다. 생각은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행위고 사유는 두루 생각하며 개념, 구성, 판단, 추리 따위를 행하는 인간의 이성 작용이다. 질문과 합리적 비판이 사유의 속성이다.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많지 않으나 사유하는 인간은 드문 것 같다. 오래 만난 사이라도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면 진정한 친구 관계는 이뤄지기 어렵다. 겉으로만 사귀는 게 서로의 인생에 유익할 리는 없다. 만남을 거듭할수록 대화는 공허해지고 표피적 생각이 루틴으로 흐른다. 세상에는 만나지 못해도 마음을 나눌 친구가 밤하늘의 별처럼 널렸다. 별자리를 가늠해 목적지를 찾는 건 각자의 몫이다. 이천 년 전 아기 예수의 탄생을 보려고 동방에서 길을 떠난 사람들처럼 말이다.
살면서 관계를 끊는 사람이 늘어난다. 내게 뭔가 잘못된 게 입력되어 소중한 인연을 끊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삶은 변화와 성장의 속성을 지녔다. 변화하지 않으면 성장도 각성도 부재한다. 나도 살면서 변했다.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란 것과 삶에는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욕망'과 '나쁜 욕망'이 있다. 좋은 욕망은 생명과 가깝고 자신과 타인을 유익하게 하지만 나쁜 욕망은 반사회적이고 반생명이다. 남을 죽이는 이기적인 탐욕에 다름 아니다.
자기중심과 인간 중심주의는 생태와 사물을 대상화했다. 만물은 모두의 것임에도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지구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위대한 아메바의 자손은 적자생존의 유전 법칙을 잘못 해석해 세상을 약육강식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국가는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부추겨 시민을 통제하고 지배한다. 자본과 권력은 교활한 괴물이 되었다.
사회의 질서를 지키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 공경하며 사업을 번창시키고 세금 잘 내는 자신은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 믿는 건 나이브한 생각이다. '단무지'는 단순 무식하여 지성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조어다. 무지나 지성은 가방끈이나 독서로 자라는 것만은 아니다. 서점 문턱에 가보지 못한 사람도 각성과 성찰을 통해 삶의 지성을 키운다. 그의 지성을 살 찌운 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의혹과 끊임없는 질문을 통한 자기반성의 결과다. 가난한 사람의 복지 정책을 두고 게으르다니 남의 땀을 공짜로 먹으려 든다고 하는 생각은 위험하다. 사유 재산의 소유가 바탕에 깔렸다. 장애인이나 늙은 노인에게 공밥을 먹지 말라는 것과 닮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핍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정책의 허점을 노리는 부당한 이기심은 찾아내는 게 맞고, 정보 부재나 무기력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은 찾아내는 배려가 옳다. 함부로 나태를 논하지 마라. 진정으로 게으른 건 그대의 무사유다.
축제와 태풍은 상관이 없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태풍이 비를 뿌린다. 어제저녁 답 계곡에서 오리가족의 나들이를 보았다.
훌쩍 자란 새끼를 데리고 주위를 살피며 물길을 오르내리는 어미의 노고가 놀랍다. 아래쪽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다슬기를 잡는다. 어미는 물가의 풀 속으로 새끼를 유인해 숨는다. 퇴비와 농약에 찌든 물에 여적지 생명이 살아 있어 다행이나 앞으로의 예감은 음울하다. 산업화 이후 사람들은 길들여진 삶의 양식을 바꿀 생각도 능력도 없다. 제 발등을 찍으며 효율과 소비를 미덕으로 치는 세상에서 산 것들의 공존은 점점 불투명하다. 코로나 시국에 축제를 벌이자 사람들이 몰려든다. 소읍 천변에 텐트촌이 생기고 길이 막힌다. 양식장에서 살찐 육봉 은어를 막힌 물에 풀어놓고 반두로 잡으며 환호성이다. 은어는 쫓기며 진땀을 빼다 녹초가 되어버린다. 유명한 가수가 줄줄이 나오고 골골이 사람들이 축제 구경에 나선다. 어떻게 살지 모르는 사람들은 죽어라 일하고 죽어라 소비하고 즐기는 게 행복이라 믿는다. 설계된 꿈을 욕망하고 사랑을 소비한다. 소비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외침에 친절한 정치가 미소로 답한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복더위의 석양 속으로 풍선을 날린다.
수모(水帽)를 샀다.
눈에 띄는 블루 원색이다. 머리에 쓰니 젊어 보인다고 아내가 말했다.
새벽밥 먹고 풀베기하고 수영장에 갔다. 오래간만에 예초기 휘두르니 어깨 팔이 아프다. 물 젓기가 힘들어 수영하다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태양광 전지판 아래 개구리가 보이지 않았다. 전자파 때문인가. 여름 풀베기할 때 풀 속에서 폴짝 뛰며 달아나던 개구리였는데. 동트자 땡볕과 전자파를 쐬며 풀을 벴다. 2세는커녕 건강한 성합도 물 건너갔다.
양조장 주인과 차 타고 시내 물회 집에 갔다. 가게 앞에 사람들이 기다릴 정도로 물회는 불티나게 팔렸다. 빽빽하게 앉아 물회 양푼에 머리 박는 사람들 보니 덜컥 바이러스가 겁난다. 바다 흉내만 낸 가자미 물회 한 그릇 뚝딱 비우고 후다닥 자리를 떴다.
양조장에 돌아오니 놀다 가란다. 잠이 쏟아지는 판에 집에 왔다. 땡볕 아래 마당 지키던 개가 반갑다며 뜨거운 혀로 손을 핥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