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터키 더비를 보다가,
5월의 첫날까지 겨울 코트를 입고 다녔다. 하늘도 어떤 날씨를 만들고 싶은지 결정하지 못한 걸까 싶을 만큼 변덕스러운 이 지역의 날씨에 익숙해진 건지, 아무렴 어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파랗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들이닥치며 장댓비가 내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구름이 걷히며 평화로운 파란 하늘이 열리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이 겨울이 언제 끝나려나 싶게 영하로 떨어졌다가, 다음 날은 반팔을 입어야 할 만큼 기온이 올랐다가, 그다음 날은 또다시 겨울 코트를 꺼내 입게 만드는, 그야말로 변덕스러운 날씨가 5월 첫날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눈부시게 볕이 좋았던 5월의 첫 토요일, 어떻게든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주말 이틀을 반납해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불편하지만 나름 분별력 있는 현실 직시였다. 주말에 바짝 몰아붙이면, 나 스스로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디게 진행되는 연구 계획서를 어느 정도는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초안이라도 나온다면 다음 주에 스트레스를 조금 덜 받지 않을까. 그러나 또 마음의 다른 한 구석에서는, 주말에 나가서 맑은 공기와 따뜻한 햇살의 기운을 듬뿍 받고 오면 왠지 글이 더 잘 써질지도 모르잖아? 라며 합리화를 해버리고 놀고 싶었다. 에라잇, 이까짓 연구 따위! 하고 쿨하게 집어던지며, 더딘 진행에 대한 자책도 불안도 그냥 모른 척하고 싶었다.
결국 오전에 잠시 글쓰기를 하고, 점심 즈음 자주 가는 공원으로 일단 차를 몰았다. 호수를 따라 12km 정도를 달릴 수 있는 익숙한 트랙 대신, 이번에는 들판과 숲을 넘나드는 조용한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호숫가와는 다르게 이상하리만치 걷는 사람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거의 없어 고요했고, 덕분에 풍경과 공기와 햇볕을 독차지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계획서 따위, 잠시 잊자, 지금을 즐기고 재충전해서 집에 돌아가서, 다시 책상 앞에 앉으면 돼.
호숫가를 한 바퀴 크게 도는 것보다 덜 힘들었던 것 같은데,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16km를 기록하고 있었다. 생수 한 병을 나눠 마시며, 달큰하게 달아오른 온몸의 열기를 느끼는 일이 얼마만인가! 싶어, 새삼 봄이 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봄이 오는구나! 간질간질한 그 설레임이 좋아서,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동네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 딱 한 잔씩만 곁들여 이른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래, 그래도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어. 밥만 먹고 가서, 다시 책상 앞에 앉을 거야.
딱 기분 좋을 만큼 적당히 땀 흘리며 자전거를 타고 와서, 가장 좋아하는 로컬 생맥주를 앞에 두고, 햇살에 반짝이는 익숙한 동네 풍경을 내다보는 일은, 겨울 내내 상상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행복한 기분을 가져다주었다. 졸업 파티에 참석하려고 양복과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수줍은 표정의 고등학생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인 듯 풋풋함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이들의 데이트도 몰래 구경하고, 반대편 테이블에서 켄터키 더비 Kentucky Derby를 위해 우아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인들과 그들의 화려하고도 거대한 모자를 구경하고... 어랏, 켄터키 더비 모자?!
아차! 오늘 저녁이야! "가장 짜릿한 2분을 선사하는 스포츠 the most exciting two minutes in sports"로 알려진 미국에서 가장 큰 경마 행사, 켄터키 더비는 실시간으로 봐야 한다. 매년 우리는, 실제로 켄터키에 가거나 (상상 초월로 비싸다) 실제로 배팅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치 진짜 배팅을 할 것처럼 진지하게, 미리 후보들을 살펴보고 마음속에 순위를 매긴다. 1, 2, 3위까지 예상해서 종이에 적어 놓고, 경주가 끝나면 누가 많이 맞췄나 비교해본다. 크고 화려하게 장식한 모자를 쓰는 것이 여자들의 드레스 코드라서, 나도 괜히 바캉스용 모자를 쓰고 티비 앞에 앉는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것은, 켄터키 더비 공식 음료인 민트 쥴렙 Mint Julep 칵테일이다. 민트 잎을 곱게 저미고, 설탕 시럽과 스프라이트에 잘 섞은 뒤, 켄터키 지방의 버번위스키와 셰킷!
아주 잠시, '아아... 계획서 마무리해야 하는데...' 생각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인 켄터키 더비를 놓칠 수는 없잖아? 게다가 일 년에 딱 한 번 마시는데, 공식 음료도 빠지면 섭섭하지! 그래그래, 한 잔만 마시자.
나는, 경마에 대해서 일자무식이다. 내가 말을 고르는 방식은, 일단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는 제외한다. 내가 응원하지 않아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을 테니, 굳이 나까지 보태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그리고 사진을 훑어보면서 아주 짙은 갈색으로 외모가 멋지게 빛나는 말을 고른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말의 이름이다. 이름에서 뭔가 기운이 느껴지는 말을 선택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냥 느낌이 끌리는 대로 고른다. 이번에 내가 응원하리라 선택한 말은 전혀 우승할 가능성이 없지만 (배당률 36:1) 순전히 그 이름 때문이었는데, "내일은 여름 Summer is Tomorrow"이라니 너무 설레잖아! 싶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말의 생일이 나와 같다는 인연(?)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저녁 6시 50분.
경주마들이 차례로 입장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클로즈업으로 잡힌다. 우리는 점점 티비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각자 자기가 선택한 말들을 눈여겨본다. 의미 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며 (왜?), 민트 줄렙을 높이 들어 건배하고, 다시 한번 자신의 예상 순위를 점검한다. 그리고,
저녁 6시 57분, 경주가 시작된다.
스포츠 역사상 가장 짜릿한 2분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요동치는 심장이 진정되지 않아서 막 소리쳤다, Summer is Tomorrow!!! GO! Run! Run! Summer is Tomorrow!!! 총소리가 나자마자, 나의 말 "내일은 여름"이 선두에 섰던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장면 앞에 목청껏 응원하는 동안에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그래, 이렇게 반전의 맛이 있어야지, 그래그래, 너도 할 수 있어, 그래그래, 나도 할 수 있어, 그래그래, 누구나 성공할 수 있어!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뛰다시피 나의 말을 응원했다. 내일은 여름~~!!!
정말 백만 배 짜릿했던 1분여의 시간이 지나고, 나의 말은 갑자기 기력이 다했는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엇! 하는 사이, 순식간에 다른 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하염없이 하염없이 뒤로 밀려나며 다른 말들 사이에 섞여버려서 눈으로 좇던 나의 시선은 금세 그를 놓쳐버렸다. 아...
그대로 자리에 앉아서 이건 뭐지, 싶은 순간 경주는 끝났다. 묘하게도, 그날의 1등은 강력했던 우승 후보도 아닌, 마지막 날 기권 자리에 슬그머니 등록하고 들어온 말, 그러니까 배당금 99:1의 말이 차지했다. 나의 말이 일등 하는 것보다 더, 반전이긴 했다.
뜻밖의 우승으로 행사장은 떠들썩했다. 인터뷰가 진행 중인 티비앞에 그대로 앉아, 멍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내일은 여름,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이번 학기를 시작하면서, 나의 다짐과 그에 따른 계획은 확고했다. 학기가 끝날 때쯤이면, 계획서를 완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사 통과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오전 4시간씩 투자하면 시간에 쫓기지 않고도 단단하고 촘촘한 연구 계획서를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매일 저녁에는 요가와 산책으로 마음을 다잡을 거라고, 거창한 계획을 세웠더랬다. 나는 항상 그랬다. 일을 시작할 때는 계획도 실행도 완벽하다. 그대로만 계속한다면 세상 뭐든 이룰 수 있을 만큼 화려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더디고 힘들게 진행되면, 그럴수록 바짝 정신 차리고 몰아붙이는 지구력이 없었다, 나에게는. 그럴수록 그냥 도망치고 싶기만 했다. 하루하루 밍그적 밍그적, 마음의 불편함을 무시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생산적으로 일을 처리하지도 못하며, 시간만 끌었다. 내일 해야지, 집에 가서 해야지, 저녁만 먹고 해야지, 켄터키 더비만 보고 해야지. 숱한 변명을 가져다 붙이며 나 스스로 내 발걸음을 더디게 했던 것이다.
세상 짜릿했던, "내일은 여름"이 일등으로 달려 나간 1분은, 마치 학기가 시작되던 지난겨울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후반전, 어느 순간 기력을 잃고 앉은자리에서 빙글 대고 있는 내 모습이 비쳐 보여서, 가슴 한편이 찌릿, 울려왔다.
결국 "내일은 여름"은 거의 꼴찌로 들어왔다. 꼴찌로라도 결승선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은 초라한 생각이 들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반쯤 남은 민트 쥴렙을 깔끔하게 마시고,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다.
처음의 마음을 기억하자, 그때의 열정과 계획을 잊지 말자, 그리고, 끝까지 달리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내일의 여름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라도, 오늘을 천천히 달려 나가자.
그냥 무작정 도망치고만 싶었던 슬럼프에서 그렇게 빠져나왔다. 나와 생일이 같지만 한참 어린 경주마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