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난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어른처럼 현실감각이 강한 아이였다. 소녀들이 꿈꾼다는 낭만적인 사랑과 결혼에 대한 로망에 무방비로 빠져드는 법이 없었다. 그 당시 챙겨봤던 만화영화나 드라마 대부분은 여주인공이 멋지고 능력 있는 남주인공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으로 끝났다. 매번 같은 방식으로 끝나는데, 결혼해야만 모두 행복하다는 결말을 낼 수 있는 건지, 의심의 눈초리로 길어진 얼굴을 자주 갸우뚱거렸다.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알게 된 이혼상담프로그램을 보면서 결혼에 품은 의구심은 좀 더 부풀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의 뒷면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여주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결혼은 현실’이라는 말을 일찍 알아채 버렸다.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며 행복한 삶의 완성이라고 말하는 쪽과 자신과 맞지 않는 짝을 만나면 불행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쪽을 함께 보면서, 내게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이 되었다.
결혼식에 대한 로망도 딱히 없었다. 결혼식에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고 부케는 무슨 꽃을 들고, 어느 메이크업샵에서 화장을 하고 머리 모양은 어떻게 할 것인지, 결혼하면 으레 준비하는 것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겨졌다. 결혼하지 않은(앞으로도 하지 않을) 친구들과 건물을 한 채 사서 각 층에 한 명씩 집을 정하고,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자고 말하곤 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는 비혼은 아니지만, 몇 살까지는 결혼해야겠다는 필혼도 아닌, 중간 지대의 결혼 선택론자로 살면서 연애는 성실하게 했다. 아무리 현실적인 나일지라도, 때론 사랑과 낭만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혀서 무조건 서로 아끼고 챙겨주는 관계를 맺고 싶었다. 몇 번 안 되는 연애를 할 때마다,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어떤 미래를 맞이할지 생각하다가 이별했다. 이별은 매번 처음 겪는 것처럼 서툴고 낯설었으며 아팠다. 한 번의 인연이 끝나고 나면, 다시 힘을 내서 새로운 인연을 기대하고 연애를 하는 나와 결혼을 하는 나를 하나씩 대입해보며, 미래의 내 선택을 궁금해했다.
그를 만난 건 20대 중반을 넘어섰을 때였다. 취업을 준비하면서 알게 돼서 친구로 지내다가 어느덧 연인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땐 조용하지만, 둘이 있을 땐 수다쟁이가 되는 우린, 성격도 좋아하는 것들도 꽤 잘 맞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고 가만히 있어도 편안했다. 변하지 않은 것처럼 안정된 하루하루가 쌓이고 약간의 변주로 흥미로운 날을 보내다 보니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우린 장수 커플이 됐다. 나이가 30을 넘어가자 주변에서 결혼은 언제 하는지 질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애를 오래 했는데 결혼을 안 하는 우리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언젠가 할 거라는 두루뭉술한 대답에 왜 안 하느냐는 질문이 곧바로 이어졌다. 연애를 오래 하면서 결혼을 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 조금 튀게 보였나 보다.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오다가 특정 연령대가 되니까 결혼은 해야 한다는 사회의 종용에 흔들리게 된다니, 나도 사회성을 가진 어쩔 수 없는 인간인 걸까. 은근히 부담을 느끼면서 반대의 마음을 갖고 싶은 청개구리 기질이 발동했다. 난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는 신념을 더욱 공고하게 이어갔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변함없이 즐겁고 아름다웠으며, 연애하는 나의 선택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몇 년이 더 지나자 결혼에 대한 질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장기연애를 하는 사람들에게 결혼을 물어보는 게 조심스러워지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부터 정해진 대답을 자동응답기처럼 대답하는 수고가 줄어들었다. 그제야 어떤 압력도 받지 않은 채, 우리 둘만 온전히 남아서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결혼식에 대한 로망은 없었지만, 결혼하고 싶은 사람에 대한 바램은 은연중에 품고 있었다. 변함없이 나를 배려하고 아껴줄 것 같은, 믿음직스러운 사람. 서로 의지가 되어주고, 힘든 일을 함께 견디고 이겨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서로의 인생을 공유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다. 우린 오랜 시간을 두고 자신의 삶과 우리가 함께 하는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유난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서, 수많은 이야기를 모으고 엮어 우리의 인생을 포개어보자고 말하기까지, 넉넉히 1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겉은 딱딱해 보여도 속은 여리고 부드러운, 남들은 알아보지 못해도 마음속에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서로를 발견했다고 느낀 순간, 결심했다. 이번에는 그동안의 선택과 다른 선택을 하기로.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다. 그리고 우리한테 어울리는, 우리의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